<기행문> ‘혁명과 축구의 나라들’에 다녀오다.
마이애미는 미국의 일반적인 도시 분위기와 사뭇 달랐다. 스페인어를 할 줄 알아야 살 수 있다고 할 정도로 히스패닉 문화가 지배적인 것이 느껴졌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혁명(revolution)’의 구호가 곳곳에 띄는 것이 반세기 전에 사망한 체 게바라(Che Guevara)가 되살아난 느낌을 주었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체게바라 어록 중>
[Guevara atop a mule in Las Villas province, Cuba, November 1958, https://en.wikipedia.org/wiki/Che_Guevara]
여장을 풀고 바로 찾은 마이애미 페레스 미술관(Pėrez Art Museum)의 전시품은 로스앤젤레스의 게티 센터(Getty Center)나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 라크마(LACMA)에서 만난 전시품들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동일한 히스패닉 문화의 영향권에 속하지만 LA 미술관의 전시품들은 정통적이고 서정적인 미술품들을 균형 있게 전시하고 있는데 반해, 마이애미 미술관의 전시품들에는 라틴아메리카의 독재자들이 축구를 어떻게 체제유지에 활용해왔는지를 고발하고, 성화(聖畫)와 성화(性畵)를 뒤섞어 표현하는 등 저항의 냄새가 짙게 배어 있었다.
온두라스, 벨리즈, 멕시코 등에서 맞닥뜨린 ‘붉게 녹슨 양철지붕’들은 서민들의 고단한 삶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주었다. 라틴아메리카 주민들의 삶이 향후 상당기간 스페인 계 상류계층과 미국 자본의 지배를 벗어나기 힘들겠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이론적으로만 접했던 종속이론과 해방신학, 그리고 오도넬(Guillermo A. O'Donnell)이 정립한 관료적 권위주의(bureaucratic authoritarianism)를 보다 가깝게 실감할 수 있었다.
상상력 자극하는 마야 문명의 실체
마야 문명에 관한 학술적 자료들은 극히 드물어 신비로움을 자극할지언정 그 대부분은 ‘가설’에 그친다. 2천 년 전 마야 족이 세워 AD 300년 ~ 900년에 황금기 누린 것으로 추측되는 마야 문명은 900년 무렵부터 서서히 멸망한 것으로 ‘추측’될 뿐이다. 거대한 계단식 제단을 갖춘 피라미드 신전으로 상징되는 마야 문명의 쇠퇴 원인에 관해서도 외부 침입설과 교역권 이동설 등 여러 설이 제기되고 있을 뿐이다. 이때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농업에 종사했던 마야인들의 인골에 영양실조의 흔적이 뚜렷하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아직 가설적 단계에 머물고 있는 마야 문명의 실체에 관한 여러 이론들은 필자의 상상력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필자의 아마추어적 상상력은, 마야 문명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인구 조절에 실패함으로써 멸망에 이른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어떤 인류학자는 바깥 세계와 차단된 인도네시아 외딴 섬 주민들의 전통적 인구조절 메커니즘을 파헤친 바 있다. 즉 주민수가 일정 규모 이상으로 늘어나면 촌장은 먹거리가 한정된 해당 지역의 인구조절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스스로 희생의 길을 택한다는 것이다. 화전농법에 의존해 오랫동안 안정된 체제를 유지해온 마야 문명의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신전(神殿)으로 추정되는 커다란 피라미드식 구조물이다. 문화인류학자들이 아직 시원하게 해명하지 못하고 있는 점은 거대한 석조물 곳곳에 설치된 인신공양 장소다. 석조물 신전은 지역에 따라 ‘여인들이 사라지는 돌’로 불리기도 한다. 마야의 지도자들은 인구 증가의 주된 원인이 되는 소녀들을 갖가지 명분을 붙여 시시 때때로 희생(犧牲)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 대목이다.
<Xunantunich Mayan ruins>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밖에 증가하지 못하기에 결혼 연령을 늦추는 등 인구 증가를 획기적으로 줄일 필요가 있다”고 한 맬더스(Thomas Robert Malthus)의 인구론을 마야의 지도자들은 2천 년 전부터 체험적으로 실천해 온 것이다.
마야 문명과 관련하여 또 하나 흥미로운 풍습은 지역 대항 경기의 우승팀 대표를, 하늘과 땅의 온갖 영광을 부여하여 희생시킨다는 점이다. 정치적 도전의 우려가 있는 잠재적 경쟁자를 ‘관습의 이름으로’ 제거하는 제도인 셈이다. 이러한 제도돌을 통해 마야 문명이 2천년 넘게 안정적으로 유지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곳곳에 세워진 사원(temple)과 제사장들이 이러한 ‘체제 유지’ 역할을 담당하지 않았을까? 통치술의 이면에 감춰진 논리를 깨친 선각자들이 그것을 밝히기까지는.
온두라스의 로아탄 섬(Roatán)과 벨리즈(Belize)의 쑤안투니치(Xunantunich)에서 만난 유적들은 마야 문 명의 이어지지 않은 고리를 이해하는 길잡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