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의 정치, 상생의 정치
안경률
정치를 처음 시작할 때부터 나는 통합과 상생의 정치를 배웠다. 동시에 통합과 상생의 정치를 실현하겠다는 마음을 가졌다. 내가 1984년 5월에 조직된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통해 정치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통합과 상생의 정치는 민추협의 궁극적 목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민추협은 YS와 DJ가 전두환 군사독재 시절에 민주화투쟁을 위해 만든 정치단체였다. 민추협은 정부 조직에 버금갈 정도로 많은 특별위원회를 갖고 있었다. 당시에는 이들 특별위원회에서 어떤 직책을 맡느냐에 따라 정치인으로서의 위상이 결정되었다.
민추협에 처음 참여했을 때 나는 30대 중후반의 비교적 어린 나이였다. 처음 나는 민추협의 과학기술특별위원회에 소속되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우연히 각 특별위원회 위원 명단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안경률이라는 내 이름 위에 작은 글씨로 ‘상’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의 이름 위에는 ‘동’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기도 했다. 무슨 뜻인지 몰라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급기야 나는 명단을 갖고 있던 동지에게 물어 보았다.
“‘상’이라는 글자와 ‘동’이라는 글자가 무엇을 뜻합니까?”
그는 아주 싱겁게 ‘상’은 상도동계 사람을 표시하고, ‘동’은 동교동계 사람을 표시한다고 말했다. 아하! 자로 저거로구나. 철저한 계파 안배의 인사를 통해 통합과 상생을 하는구나! 처음으로 나는 이렇게 하는 것이 통합과 상생의 정치의 시작이라는 것을 배웠다.
민추협은 이처럼 모든 직책을 상도동계와 동교동계가 적절히 나누어 맡아 민주화운동에 임했다. 따라서 조직에 특별한 갈등이 있을 리 없었다. 각 계파의 위원들이 온힘을 다해 앞장을 서자 당연히 민주화운동은 시너지 효과를 냈다. 그때마다 나는 이렇게 조직을 구성하고 서로 협력하고 협조하면 엄청난 에너지가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일 년쯤 지난 뒤였다. 과학기술특별위원회 평위원으로 민추협에 참여했던 나는 어느덧 노동국 부국장이 되어 있었다. 당시 노동국 국장은 나중에 광주시장을 지낸 동교동계 박광태 씨였다. 상도동계인 나는 동교동계의 박광태 노동국장과 함께 일하면서도 안배와 배려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익힐 수 있었다. 안배와 배려의 정신이야말로 상부상조의 정신을 이루는 근간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서로 협조하고 협력하는 정신이 내 정치사상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믿는 것도 사실은 이 때문이었다.
나는 한나라당도 이런 민추협의 정신을 참고해 서로가 협조하고 협력하기를 바랐다. 그럴 때 한나라당이 꿈꾸는 대한민국을 만들 수 있을 것이었다. 안배하고 배려하는 정신은 나날의 삶에서도 매우 중요했다. 선조들이 강조했던 상부상조의 정신도 실제로는 안배하고 배려하는 정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한나라당의 사무총장을 맡았을 때 나는 당직자나 사무처 인사에서 그런 통합과 상생, 안배와 배려의 정신을 원칙으로 삼았다. 가능하다면 당의 살림을 맡는 사무부총장이나 주요 당직자들의 경우에도 능력을 고려하는 동시에 계파별로 안배해 선임하려고 애를 썼다. 당의 각 본부장 자리는 물론 사무처의 국장 자리도 나는 박희태 대표와 깊이 상의하는 가운데 계파별로 적절히 안배하고 배려하려고 애를 썼다. 예를 들면 전략기획본부장 자리가 그랬다. 내가 전략기획본부장으로 추천한 사람은 이명규 의원이었다. 이명규 의원은 강재섭 전 당대표의 측근이었다. 따라서 이명규 의원은 비주류 인사라고 할 수 있었다.
이처럼 비주류 인사를 주요 당직인 전략위원장에 추천한 뒤 그 산하 조직의 책임자는 주류 인사가 맡도록 했다. 즉 전략기획본부 산하의 전략기획위원장에는 정태근 의원, 정보위원장에는 현경병 의원 등을 추천한 것이었다. 일종의 탕평책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런 안배와 배려 없이 통합과 상생의 정치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생각이 조금 다르다고 하여 다른 사람을 경원시하거나 배척해서는 안 된다.
홍보본부장의 자리에 사람을 임명하면서도 나는 안배와 배려의 원칙을 십분 살리려고 했다. 홍보본부장에는 친박계의 한선교 의원을 추천했고, 그와 호흡을 맞춰 일할 홍보부본부장에는 친이계의 강승규 의원을 추천했다. 주요 당직을 이렇게 계파별로 안배해 서로 협력하는 가운데 시너지 효과를 내도록 하자 불협화음이 일 리 만무했다. 적어도 내가 사무총장으로 일하는 동안에는 친이-친박계 의원들 모두 총력을 다해 당무에 임했다.
박희태 대표에게도 나는 늘 인사의 이런 원칙을 진지하게 말씀 드렸다. 박 대표는 물론 처음에는 매우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래도 나는 몇 차례 더 건의해 이런 원칙을 관철시키고자 했다. 당의 각 위원회를 조직할 때도 마땅히 이런 원칙을 적용했다. 결코 친이계 인사만으로 위원장이나 위원을 채우지 않았다. 일단은 당내의 민주화부터 필요하다는 것이 내 소신이었다.
당의 사무총장으로서 나는 이처럼 계파별로 서로 협력하면서 시너지 효과를 거둘 수 있도록 조직을 꾸렸다. 그럴 수 있었던 데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민추협 시절 YS와 DJ가 권력을 나누어 서로 협력하는 방법과 기술을 익히 보아 왔기 때문이었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갈등을 최소화하고 조직의 역량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계파 간에 권력을 나누면서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당시는 민추협 시절처럼 ‘민주화’라는 커다란 공동의 목표가 있지는 않았다. 따라서 조직이 100% 만족스럽게 가동되지는 못했다. 나로서는 그런 것이 다소 아쉽기는 했다. 그래도 내가 사무총장을 하면서 통합과 화합의 정치를 주도한 것에 대한 긍지와 보람은 아직도 마음 속 깊이 남아 있다.
안경률 의원의 저서 「발로 뛰는 경제 살리기」 (푸른사상사, 2011. 1판 5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