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길목에서 한국의 미래를 고민한다
임 현 진
서울대 명예교수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
오래전 한국의 원로 사회과학자께서 “한국이 망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고 말씀을 한 적이 있다. 세월호 참사, 메르스 사태, 가습기 사건, AI 재앙에서 보듯 국민을 보호해야 할 정부는 능력도 없고 책임을 지려하지 않는다. 경제위기는 눈앞에 와있고 안보위기도 만만치 않은데 탄핵정국아래 국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이게 나라냐”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국민을 이끌고 가야 하는 것이 국가인데 그와는 정반대이니 심각한 지경이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의 중심에서 개판을 쳐 왔는데도 불구하고 나라가 굴러가고 있는 이유는 시스템, 즉 법과 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평소 우리 사회의 미래를 위해서 사람 보다 시스템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왔다. 공정한 법과 제도를 만드는 것이 유능한 지도자의 리더십 보다 우선한다고 본 것이다. 튼실한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으면 권력의 변화에 따라 사람이 바뀌어도 정부의 여러 정책들이 연속성을 가지면서 나라가 무리 없이 굴러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최순실이란 비선실세에 의한 국정농단을 보면서 법과 제도 못지않게 지도자의 소양과 자질이 중요하다고 본다. 최근 대통령의 발언이나 행실을 보면 국민의 안위에 관한 정부 시스템의 허술함도 문제이지만 공사구분이 없는 대통령의 무지하고 멍청함에 부끄러울 뿐이다. “늑대는 이빨을 잃어도 천성을 버리지 않는다”라는 서양속담처럼 반성은커녕 반전을 시도하는 모습에 분노는 커지고 있다.
이번 박근혜 대통령을 포함한 주변 비서와 참모들에 의한 헌법유린, 기밀유출, 국기문란, 직권남용은 그나마 존재하는 법과 제도도 기본이 없는 사람들에 의해 무차별하게 유린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간 피와 눈물로 이룬 민주화에 대한 모독이다. ‘비정상의 정상화’를 외친 대통령이 비정상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한국판 라스푸틴’이라고 불리 우는 최태민이가 누구이기에 그 딸들이 호가호위하면서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을까. 그 일가와 40년 걸친 혼몽한 주술의 망령아래 국정의 주체가 그의 딸과 문고리들이고 청와대 수석과 내각의 장차관은 이를 받쳐주는 하수인에 지나지 않았는가.
전국의 도시에서 아홉 차례에 걸친 주말 촛불 시위에 나선 9,00만 시민들이 지닌 공통된 분노다. 그러지 않아도 정치인 박근혜의 행적에 대한 의문은 많았지만, 누가 뽑았건 대통령이라는 한국을 대표하는 수장에 대한 예의에서 개인사에 대한 언급을 자제하여 왔을 것이다. 그러나 외교, 국방,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 거의 모든 주요한 국가정책의 결정과정에서 헌정질서를 파괴하고 국가기밀을 누출하고 국정체계를 무너뜨린 책임에서 대통령 박근혜는 자유로울 수 없다. 이른바 최순실게이트의 몸통이 바로 대통령 자신이기 때문이다.
두 개의 국민
근래 한국은 마치 ‘러닝 머신’에 서 있는 것처럼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 일인당 국민소득 2만 불을 넘은지 10년이 됐다. 그러나 인구 5천만이 넘는 나라로 2012년 세계에서 일곱번째로 20-30클럽에는 가입했지만, 일인당소득 3만불에 달하는 30-50클럽에 가입을 눈앞에 두고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
해방 직후 한국은 선진국들이 자동차, 선박, 비행기 등을 만들었을 때 자전거조차 만들지 못했다. 오늘의 한국은 선박, 자동차, 반도체, 스마트폰, 석유화학 등 생산에서 세계 선두를 달리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세계경제 규모 2위 중국과 3위 일본 사이에 끼어있다. 중진국 함정은 벗어났지만 겉모양은 선진국인데 행동은 후진국이라 할 일종의 ‘피터 팬’ 증후도 보인다. 흥미롭게도 대학진학률은 세계 1위인데 성형수술율과 자살율과 산재율도 세계 1위다.
그간 한국은 후발(後發) 발전국으로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루어 왔다는 자부심을 가졌다. 그러나 압축발전의 과정에서 전후좌우를 살피지 않고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 왔다. 과정 보다 결과, 내실 보다 외형, 안전 보다 속도를 중시하는 적당주의, 형식주의, 편법주의가 나타났다.
이미 한국은 공동사회에서 이익사회로 바뀌었다. 경쟁과 효율을 강조하다 보니 협동과 연대가 약화되고 있다. 우리 사회에 도처에 불통, 불신, 불만, 불안 등 4통이 보인다. 우리는 마음을 열고 서로 소통하면서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더불어 살 수 있는 공동체를 복원하기 위해 경제자본 못지않게 사회자본을 키워야 한다.
유엔이 발표한 ‘2016년 세계행복보고서’에 의하면 한국은 157개국 중 58위를 차지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 35개국 중 29위로 하위권에 위치한다. ‘국민행복시대’를 표방한 박근혜정권에 들어와 2013년 41위, 2015년 47위, 그리고 2016년 58위로 계속 떨어지고 있다. 젊은 세대가 ‘헬조선’을 말하듯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소득불평등도 나빠지고 있지만 행복불평등은 더 악화되고 있다.
OECD국가들 중에서 한국은 사회갈등의 수준이 매우 심각하다. 박람회에 온 것 같다. OECD 국가들 갈등지수 평균이 0.51이고 핀란드가 0.18로 가장 낮고 일본이 0.40 미국이 0.49라면 한국은 0.62로 평균보다 좋지 않다. 해결능력도 취약하다. 온갖 사회갈등—계층갈등, 세대갈등, 이념갈등, 지역갈등, 성갈등 등—으로 가득 차 있다. 갈등은 나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회갈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사회가 살아 움직인 다는 얘기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회갈등을 소모적이고 파괴적인 것에서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것으로 바꿔가야 한다. 민주주의의 대화와 타협의 정신을 통해 사회갈등을 극복하여 사회통합으로 가는 21세기 한국의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한국은 세계화라는 기회와 위협에 마주하고 있다. 얻은 것도 많지만 잃은 것도 많다. 문제는 성장과 배제가 동시에 일어나는 상극적 발전(antagonistic development)이다. 사회경제적 양극화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사회경제적 양극화는 단순히 빈부격차의 차원을 넘어 도시와 농촌, 대기업과 중소기업, 취업자와 실업자, 정규직과 비정규직, 그리고 남성과 여성 사이에 구조화되고 있다. 세계화가 명암이 교차하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지만, 이른바 ‘80대 20’의 사회가 남의 문제가 아닌 우리의 현실로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모래시계형 사회가 가져올 위험은 ‘두개의 국민’으로의 분열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그러므로 우리는 해방 70년의 압축발전의 빛과 그림자를 미분하고 적분하여 미래 한 세기를 준비해야 한다. 전(前)근대, 근대, 탈(脫)근대의 시간적 중첩아래 이루어진 과(過)발전, 저(低)발전, 미(未)발전의 공간적 병존이라는 복합이행사회로서 한국을 보자. 이 와중에서 경제성장에 비한 사회복지의 지체, 도시화에 따른 농촌 공동체의 파괴, 난(難)개발에 따른 환경오염과 생태위기, 네트워크 사회의 도래에 따른 인간관계의 변화 등이 나타나고 있다. 집단주의와 개인주의, 권위주의와 평등주의, 명분주의와 실용주의, 귀속주의와 업적주의, 정의(情誼)주의와 합리주의 등 사회관계에서 서로 다른 조직원리가 충돌한다.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집단 이기주의, 물질 만능주의, 반인륜적 행위, 생명 경시풍조 등이 그 표출이다.
세계화 와중에서 비교우위에 입각한 교역을 통해 우리가 먹고살고 있지만 한국의 현실은 매우 어렵다 못해 참담하다. 식량의 자립도 26퍼센트, 에너지 자립도 3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시장에서 식량이나 에너지 위기가 오면 그야말로 생존의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세계경제는 ‘장기적 침체국면’(secular stagnation)에 접어들어 있다. 지구 도처에서 나타나는 경제, 자원, 환경 등 복합위기가 그것이다. 특히 저출산.고령화 추세가 이어진다면 한국의 인구는 2031년 5,296만명으로 정점에 오르고 2096년에 반 토막이 되고 2100년에는 2,200만명으로 줄어들 것이다. 2040년이 되면 한국 인구의 중위연령이 52세로 올라가고 25% 정도의 일하는 사람들이 65세 이상 노령자와 14세 이하 유년층을 먹여 살려야 한다. 결국 경제활동인구가 급감으로 인해 생산과 소비가 멈추는 인구절벽-->재정절벽-->국가절벽 시나리오를 가상할 수 있다.
생산가능인구는 내년부터 감소하기 시작하여 인구오너스 시대를 마주하고 있다. 노동인구의 감소와 부양인구의 증가는 장기적으로 경제성장을 둔화시킬 것이다. 앞으로 10년 동안 세수 보다 세출의 증가로 인해 정부의 재정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되어 있다. 복지, 교육, 국방, 산업 등 세출수요는 늘어나게 되어 있지만 지금의 조세체계로는 이를 감당하기 어렵다. 2016년 현재 국가 1,000조, 기업 1,200조, 가계 1,300조 빚을 지고 있다. 국가부채의 경우 GDP 대비 50%를 넘어 있다.
민주주의의 현주소
비교지평에서 볼 때 민주화에 관한한 한국은 성공한 나라로 평가되고 있다. 제3파 민주화라는 후발주자이지만 지난 30년간 두 번에 걸친 여야 사이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통해 민주주의를 절차적 수준에서 정착시켜왔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민주주의로의 이행은 민간정부의 수립을 가르키며, 공고화는 민주적 문화.규범.절차.제도의 정착을 의미한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이러한 민주주의 이행과 공고화라는 이 단계 모델에 관한 많은 비판이 있어 왔다. 첫째, 민주주의의 공고화는 이행이후에 자동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역진될 수 있다는 문제이다. 베네주엘라, 그리스, 이탈리아 등이 보기이다. 둘째로, 민주주의에는 절차적 수준에서도 선거민주주의 (electoral democracy)나 자유민주주의 (liberal democracy)와 같은 유형화가 가능하다는 지적이다. 한국은 아직 자유민주주의라 할 기본권 보장에서 미흡하다. 셋째로, 민주주의 이행이후 나타나는 정권은 그 이행방식의 성격에 따라 권위주의 세력과 민주주의 세력이 섞여 있는 혼합정체 (hybrid regime)라는 사실이다. 김영삼정권이래 지금까지 아직도 그러한 성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의 <자유의 집>(Freedom House)이 발표한 2016년 세계 민주주의 현황을 보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정치적 권리는 양호하지만 시민적 자유는 그렇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즉, 참여와 경쟁이 선거를 통한 대표선출로 이어지는 정치적 권리는 보호되지만, 법치가 지켜지지 않고 위축된 언론의 자유와 시민사회에 대한 위협이 상존한다는 점에서 온전치 못하다는 것이다.
특히 한국의 민주주의는 낮은 투표율에서 볼 수 있듯 일반대중의 정치 기피 혹은 혐오로 인해 그나마 지금까지의 민주주의의 성과조차 거꾸로 돌릴 수 있는 불안을 안고 있다. 민주주의의 사회경제적 기반이 취약하다. 민주화이후 참여와 경쟁이 형식적으로 이루어짐으로써 일부 계층의 이해만이 절차적 민주주의에 반영되는 한계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사회적 권리(시민권)나 경제적 급부(복지)의 확대와 같은 민주주의의 실질화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한국은 권위주의로부터 민주주의의 이행과 함께 통치를 넘어 정치가 서서히 복원되어 왔다. 그러나 박근혜정권을 전기로 하여 정치가 통치로 서서히 회귀하고 있다. 과거 박정희정권 때 있었던 사회 주요 인사들에 대한 성분조사가 이루어지고 있고 국정원의 사법부 사찰이나 검찰의 권력의 시녀화에서 보듯 삼권분립이 제대로 확립되어 있지 못하다.
우리 민주주의는 미국식 권력구조를 전형으로 하고 있다. 비록 연방주의와 양원의회라는 점에서 미국과 차이가 있지만 한국은 대통령중심제와 삼권분립의 이상을 미국식 민주주의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한국 민주주의는 실제에서 미국식과는 상당한 일탈을 보이고 있다. 첫째로, 입법.행정.사법 삼부는 행정부에 의해 장악됨으로써 삼권분립이 형식적으로 이루어질 뿐이다. 입법부나 사법부의 자율성은 상당히 훼손되어 있다. 둘째로, 지나칠 정도로 강력한 대통령의 힘이다. 이른바 ‘제왕적 대통령’ (imperial presidency)아래 의회주의가 제대로 기능하고 있지 못하다.
21세기 한국 정치의 새로운 파라다임은 협치(協治)이다. 국가와 시민사회 그리고 시장이 서로 견제와 균형을 통한 협치만이 세계화의 파고를 제대로 헤쳐나갈 수 있는 지배양식이다. 이해조정자로서 정부, 비판적 협조자로서 NGOs, 그리고 국부의 창출자로서 기업 사이의 동반자적 관계가 필요하다. 그러나 대기업 중심의 경제아래 정경유착이 나타나고 국가는 정부 정책에 비판적인 NGOs를 배제하고 있다. 국가의 선도적 역할아래 시민사회의 비판능력과 시장의 경쟁능력이 시너지가 나타날 수 있도록 근본적 변화가 요구되고 있다.
일찍이 헤겔(Hegel)은 변화하는 것만이 가장 영속적인 것이라 했다. 그러나 우리 정치는 윤회(輪回)는 있어도 진화(進化)가 더디었으니 가히 혁명적 변화는 꿈꾸기 어려웠다. 민주주의는 아래로부터의 대표성과 위로부터의 책임성이 제대로 구현되어 있지 못하다. 오늘의 정치를 보면 정부가 공정하고 투명한 정책 형성과 집행을 통해 이해조정의 역할을 온전히 수행하지 못했고 국민의 기본적 권익은 내팽개쳐지는 경우가 많았다.
서구의 정당사는 정당의 발전이 엘리트정당, 대중정당, 중도통합정당 (catch-all party), 그리고 카르텔정당의 순서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우리의 정당들은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지역연고에 의해 움직인다는 점에서 전국적 대중기반이 미약하다. 엘리트정당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이나 국민의 당은 여소야대의 국회에서 안밖으로 분열과 갈등에 쌓여 존재감이 보이지 않는다. 오죽하면 정당무용론이 나오고 급기야 국회해산론까지 등장하고 있을까.
정당정치의 퇴화는 비단 우리만의 현실이 아니라 전세계적인 현상이다. 민주주의가 발달한 유럽이나 미국의 경우 선거에서의 승리를 위해 ‘잡동사니’(catch-all) 구호를 내걸다 보니 정당의 기본색이 바래고 결국 정강정책의 차별성이 없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개혁을 둘러싼 진보와 보수 사이의 정책대결은 희미해지고, 이념과 노선이 서로 다른 정당들이 권력장악을 위해 동거정부나 연합정권을 구성하고 있는 처지다. 기본색과 무관하게 정당들이 수시로 헤쳐모여를 통해 해산 혹은 결성됨으로서 국민의 이해대변을 위한 정당정치의 기능이 취약할 수밖에 없다.
한국 정당정치의 불모성은 정당(政黨)이라기 보다 정당(情黨)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두 가지를 강조하고 싶다. 첫째, 당조(黨祖)격인 ‘오너’가 없어진 대신 중간보스들의 이해관계가 얽히고 설켜 있기에 공당(公黨)이라기 보다 사당(私黨)의 성격이 강하다. 둘째, 전국적 기반이 여전히 취약하다 보니 대중적 지지를 갖지 못하는 지역당에 머무르게 된다. 결국 정당이 국민의 다양하고 상충하는 이해를 대변하는 구심력을 갖기 어렵다.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라 할 아래로부터의 대의성과 위로부터의 책임성이 구현될 수 없다.
국민주권 확대를 향한 개헌
우리나라 헌법은 완벽하다가니 흠결도 전혀 없지 않다. 그런데 최근 헌법개정 논의를 보면 헌법정신을 살리기 보다 헌법을 바꾸는 것 자체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여전히 권력구조 개편에 매몰되어 있다. 그러나 헌법에 살아 숨쉬는 민주, 인권, 평화, 평등 등 헌법의 가치의 구현이 보다 중요하다. 특히 국민의 기본권 신장과 지방자치 분권에 대한 관심을 키워야 한다.
건국이래 우리는 아홉 번 헌법을 개정했다. 거의 모두 격변기에 헌법개정이 이루어졌다. 민주주의의 발전이기 보다 민주주의의 쇠퇴였다. 장기적 안목에서 국민주권의 신장이라는 목표보다 단기적 시야에서 권력 나눠먹기에 대한 이해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제 헌법개정의 방향은 국민주권의 확대를 겨냥하여 권력구조 개편을 넘어서야 한다.
우리 사회가 다원화되고 계층.세대.이념 등 복합갈등이 심화되면서 이른바 ‘87년 체제’의 산물이라 할 5년 단임 대통령제가 수명을 다한 것은 사실이다. 대통령 5년 단임제는 당시 ‘3김’사이의 권력나누기를 위한 편의로 등장한 바 있다. 그러므로 이제 국민들의 다양하고 복잡한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늘어나는 불평등과 양극화를 극복하기 위한 정치와 경제의 시스템 정비가 필요한 시점이다. 지금의 대통령 5년 단임제는 국회의원 임기 4년과 서로 엇갈림으로써 국회의 행정부에 대한 견제나 대통령의 임무수행에 대한 국회의 비협조라는 문제를 지니고 있다. 이른바 4x5 매직의 관점에서 보면, 헌법개정의 적기는 국회의원 임기와 대통령 임기가 맞물렸던 2012년이었다.
특히 한국의 대통령 5년단임제는 대통령에게 비상선포, 계엄령, 국가안보를 위한 국민투표 등 막강한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 미국 보다 더 강력한 제왕적 대통령을 가져올 수 있다. 5년 단임제는 재신임의 기회가 없기 때문에 임기 시작과 함께 레임덕 문제에 직면하여 리더십 발휘에 어려움을 가질 수 있다. 이는 무책임성과 비효율성의 근원이라 할 수 있다. 당선이전에는 포풀리즘에 호소하기 쉽고, 당선이후에는 유권자와의 공약을 경시할 수 있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선출시기가 다름으로 의회선거에서 견제심리가 나타남으로써 서로 다른 정파가 권부를 분할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바로 대통령제의 기능을 저해할 수 있는 분점정부의 출현이다.
우리처럼 양당중심의 다당제아래의 대통령중심제가 정치불안의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렇다고 내각책임제가 안정적이고 효율적이라고 하여 그것을 무조건 대안이라고 말하기 쉽지 않다. 내각책임제가 자리잡기 위해서는 정치인의 식견과 자질 향상, 수용과 협상 문화의 발달, 그리고 직업관료제의 정착이 필수요건이다. 특히 정당들 사이의 정책대결이 취약한 상황에서 내각책임제는 국민의 의사와 무관하게 정치인 사이의 야합을 가져올 수도 있다.
유럽에서도 내각제는 입헌군주제아래나 또는 이원집정제의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우리의 경우 내각책임제의 수용은 정경유착의 심화와 아울러 정당담합을 가져올 수 있다. 1990년 보수대연합의 고리가 내각책임제였으나, 김영삼은 밀약을 버리고 대통령이 되었고 총리를 노린 김종필은 물을 먹었고 노태우는 퇴임후 힘을 잃고 감옥으로 갔다. 1996년 DJP연합도 내각제를 전제로 가능했지만, 김대중은 김종필을 총리에 안치는 대신 개헌은 무시해버렸다. 정권 유지나 창출을 위해 내각제는 권력 나눠먹기로 악용되었다. 현행 대통령중심제에도 권력분산의 측면에서 내각제적 요소가 다분히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살아 숨쉬게 하는 것이 먼저 할 일이다. 오히려 통일한국의 전망에서 4년제 대통령의 중임을 포함하여 부통령제의 신설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이원집정제다. 분점정부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대통령이 외치, 총리가 내치를 맡자는 이원집정제는 매우 위험하다. 이원집권제는 내각책임제의 정치전통이 있는 곳에서 가능한 권력구조다. 프랑스에서 볼 수 있듯이 서로 다른 정당의 대통령과 총리가 동거정부를 구성할 때 이원집정제는 행정부안에의 노선차이로 인해 국정난맥과 혼란을 자초하게 되어 있다. 이원집정제의 효시 불란서의 동거정부는 중요한 국내외 현안해결에서 나타나는 파열음으로 인해 시민사회의 분열과 갈등을 더욱 조장한 바 있다.
소선거구제와 달리 중대선거구제는 선거를 인물 보다 정당 위주로 치르게 하는 장점이 있다. 특히 승자독식의 현행 다수투표제 아래에서 소선거구제는 새로운 정당의 원내진입이나 지역구도를 타파하기가 쉽지 않다는 단점을 갖는다. 그럼에도 중대선거구제는 겉으로 특정 정당의 지역독점을 완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의석분포의 지역교차를 통해 기존 정치엘리트 카르텔을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다당제의 정착을 위해 중대선거구제로의 개편을 신중히 고민해 볼 필요가 있지만, 우리가 현재 채택하고 있는 1인 2표의 폐쇄형 비례병립제를 독일식 권역별 개방형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로 강화하여 소선거구제의 한계를 보완할 수도 있다. 선거의 중심에 정당을 내세울 수 있고, 신진 인물과 정당의 진출을 용이하게 만들어 주면서 지역에 근거한 엘리트카르텔을 깰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행 국회의원 정수를 유지하면서 비례대표를 늘리려면 지역구가 축소될 수 밖에 없는 딜레마가 있다.
시민혁명을 위한 협약
나는 개헌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은 때가 아니다. 탄핵정국의 초점이 흐려지고 오늘의 헌정파괴의 본질을 희석시킨다. 탄핵후 개헌 논의도 빡빡한 대선일정을 고려하면 정책대결을 우습게 만들 우려가 크다. 차라리 대선후보들로 하여금 집권 중 개헌을 추진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것이 낫다. 대권후보들 사이의 권력동기에 따른 내각제나 이원집중제 개헌을 매개로 한 야합이나 거래는 국민이 원하는 구(舊)체제의 청산을 남겨둔 채 보수지배연합의 개편으로 흐를 수 있다.
지금 촛불은 진정한 민주주의를 말하고 있다. 이미 지적하였듯이 자유와 평등의 이상을 사회적 권리(시민권)나 경제적 급부(복지)의 확대를 원한다. 정당무용론과 국회해산론이 의미하듯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넘을 수 있는 대안을 고민하고 있다. 그러나 촛불의 광장에서 토론을 통한 심의민주주의나 모두 참여하는 직접민주주의는 제도화의 과정을 밟지 않으면 지속되기 어렵다. 자칫하면 촛불에 맞불을 놓음으로써 정치안정을 빌미로 파시즘의 역공이 나타날 수 있다.
한국의 정치가 바로서기 위해서는 현실변화를 눈 여겨 보아야 한다. 정당정치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지고 있고, 선거제도에 대한 회의도 나타나고 있다. 근래 미국과 유럽에서 나타나고 있는 좌우 포풀리즘도 결국 정당정치의 부전에 따른 대의민주주의의 실패에서 기인하고 있다. 이제 정치는 좌우 사이 보다 위와 아래 사이 즉, 엘리트와 대다수 국민 바로 일반 대중 사이의 격차를 고민해야 한다. 세계화의 와중에서 늘어나는 소득과 자산의 불평등으로 인한 사회와 문화의 양극화가 그것이다. 지난날의 진보와 보수라는 1차원적 사고로는 극복이 어렵다.
흔히 선거를 민주주의의 꽃이라 하지만, 섹스가 사랑의 전부가 아닌 것처럼 선거는 민주주의 필요조건은 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지난날 대표자의 교체를 통해 변화를 가져온다는 선거의 의미는 사라지고 있다. 지금의 체제에 만족하지 않더라도 투표해 보아야 변화가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절망감으로 일반 대중은 투표를 안하는 것이다. 투표율 하락의 근본 원인이다. 이제 시민은 선거 결과에 대해 기대를 걸지 않는다. 바로 인터넷이나 광장의 정치에 호소하는 배경이다.
정당 중심의 선거는 퇴색하고 있다. 사이월드, 트위터, 페이스북으로 무장한 일반 대중이 SNS를 통하거나 광장에서 지지자 중심의 여론을 조성함으로써 정당조직 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이탈리아나 스페인의 온라인 정당이 좋은 보기다. 우리의 경우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후보가 촛불시위를 통해 기존의 대권후보 선두주자를 따라잡을 수 있는 것은 SNS와 광장이 민심을 결집해 줌으로써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그 어느 때 보다도 제3의 정치세력이 중앙과 지방 수준에서 뭉칠 수 있는 기회이다. 그러나 이른바 제3지대론이 기존 보수지배연합을 넘어 여야4정당을 아우르는 대통합을 이루어낼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한국정치의 미래를 위한 비패권 제3지대론의 가능성과 동시에 한계다.
자본주의는 시민사회없이 가능하지만, 민주주의는 시민사회가 있기에 가능하다. 시민사회의 핵심은 공론장이다. 한국 민주주의가 민주화 20년 이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까닭은 토론과 비판이라는 협의문화의 미숙에 있다. 물론 SNS는 기능과 역기능을 지닌다. 한편으로 대의민주주의의 대표성을 보완하여 직접민주주의에 가까이 갈 수 있다면, 다른 한편 시비를 가리기 보다 감정에 호소하는 파열음을 냄으로써 소음민주주의(dinocracy)로 나아 갈 수 있다. 그럼에도 SNS에 대한 모두 일방적 규제는 올바른 방향이 아니다. 시민적 권리와 의무의 자각을 통해 잘못된 정보를 여과할 수 있는 의식개조와 자율정화가 효율적이고 적절한 해답이다. 언로가 열려있지만 왜곡되어 있는 한국사회에서 SNS는 그나마 서로 대화와 소통을 통해 민의를 대변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모바일혁명은 일반 민중을 수동적에서 능동적으로 바꾸면서 SNS를 통해 국내외 주요 현안에 개입하는 감독자시민(monitorial citizen)을 배출하고 있다. 네트워크 시대의 도래다. 20세기가 자동차로 고속도로를 달리는 시대였다면, 21세기는 모바일로 네트워크를 달리는 시대라 할 수 있다. 이제 어느 지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나 현상도 시간과 공간이라는 독립성을 넘어 다른 지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오늘의 세계에서 개인이나 제도는 '여기 있음'(present)에 구애받지 않고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여기 없는'(absent) 상대방과 연결과 소통이 가능하다. 모래알 같이 흩어진 대중의 결집이 이루어지는 배경이다.
과연 오늘의 촛불은 시민혁명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동서고금 사회운동사에서 지금까지 9,00만명이 모인 촛불 시위는 찾아보기 어려운 비폭력 저항운동임에 분명하다. 1987년 민주항쟁과는 비교가 될 수 없는 의미를 지닌다. 대통령이 망쳐버린 나라를 국민들이 구하려 일어섰다.
돌이켜 보면, 6월 민주항쟁 이후 시민들이 만들어 논 변화의 돌파구는 정치지도자들에 의해 배반당한 바 있다. 그 배경과 원인을 깊이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바로 권위주위로부터 민주주의로의 이행방식이다. 시민들의 아래로부터의 도전에 직면하여 반대세력의 온건파와 집권세력의 개혁파 사이의 타협에 의해 가능했다. 이러한 ‘거래에 의한 이행’ (transition by transaction)은 불행히도 정치엘리트 수준에서 정치적 협약을 가져왔지만 전체사회 수준에서 사회적 협약을 이끌지 못했다. 한국 민주화 과정에서 지식인, 학생, 노동자, 시민의 역할이 컸다면 정치엘리트들은 권력 장악 내지 유지에 화급했던 나머지 민주주의의 활성화를 위한 사회적 협약을 이끄는데 거의 관심을 갖지 못했다. 이는 김영삼정권과 김대중정권이 서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구체제와 신체제 사이의 혼합정체의 성격을 갖게된 것과 무관치 않다. 두 민간정부는 결국 인적청산의 미비로 인해 체제쇄신에서 광범한 개혁의 추진에도 불구하고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점에서 김대중정권의 1998년 봄의 노사정합의는 일종의 사회적 협약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이 당시 노사정합의는 경제위기에 따른, 마치 경제주체들 사이의, ‘마지못한’ 합의로서 그 이후 아무런 진전이 이루어지지 못해왔다는 한계를 갖는다. 이는 처음부터 노사정위원회에 합당한 법적 위상을 부여하지 못함으로써 나타난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노사 사이의 오래된 신뢰 부족과 두 개 조직으로 갈라진 노동계의 현실 또한 노사정위원회의 허약한 위상을 설명해 줄 수 있다.
민주주의는 협약 (pacta)없이 자리잡기 어려우며 그것도 정치적 협약을 넘어 사회적 협약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한 온전한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 이제 22세기 한국의 생존을 위해서 국가대개조가 필요하다. 이것은 국민참여없이 가능하지 못하다. 이제 소명을 다한 87년 체제를 넘어서 진정한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혁명의 완성을 위해 NGOs를 중심으로 시민사회가 여야를 압박하고 중재하면서 초정파적 구심력을 가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