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시선] 쪽지 예산 구태, 촛불민심 배신이다
정국 혼란 틈타 지역구 예산 나눠먹기국회 심의과정 공개해야 쪽지 사라져
세계일보: 2016. 11. 30.
최순실 게이트로 정국이 전례 없이 어수선한 가운데 2017년도 예산안의 법정처리 기한이 바로 코앞에 다가왔다. 헌법 제54조는 회계연도 개시 30일 전까지 국회가 예산안을 의결하도록 규정하고 있기에 내년도 예산안은 내달 2일까지 국회를 통과해야 한다. 이런 가운데 박근혜 대통령은 29일 급기야 “임기 단축 포함 진퇴, 국회 결정에 맡기겠다”고 표명하기에 이르렀다. 매주 토요일마다 전개되는 촛불시위의 영향이 클 것이다.
이종수 한성대 명예교수·행정학
국민들은 어수선한 정국을 틈타 예산 과정이 혹시나 소홀히 다루어지는 것이 아닌지 우려하고 있다. 또한 예년과 마찬가지로 ‘계수조정소위원회’ 등에 여야 당 간부 의원들의 민원성 쪽지가 드나들면서 ‘누더기 예산’으로 변질되는 것이 아닌가 우려한다. 벌써 그런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쪽지 예산’ 행태는 조금도 개선되지 않고 있으며, ‘위풍당당 코리아 사업’ 등 소위 ‘최순실 사업’으로 깎인 예산 1748억원을 놓고는 의원들 간에 국고(國庫)를 차지하려고 서로 달려드는 ‘구유통 정치’(pork barrel politics)의 추태가 벌어지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작금에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제왕적 대통령’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국민 대표성을 지닌 또 하나의 국가기관인 입법부에 보다 많은 권한이 분산돼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국회에 대한 불신이 만연한 우리의 상황에서 국민들은 국회가 국정 운영의 중심이 되는 제도 개혁에 동의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입법부와 국회의원 개개인에 대한 국민의 총체적 불신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는 예산 국회가 우선 모범적으로 운영돼야 한다. 무엇보다 ‘쪽지 예산’ 과 ‘예산 나눠먹기’를 위해 의원들 상호간에 숙원사업 지원해주기 행태가 바뀌어야 할 것이다.
매년 예산안 심의가 시작되면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여야 간사들은 해마다 ‘쪽지 예산’ 근절을 다짐한다. 그러나 ‘쪽지 예산’ 행태는 조금도 개선되지 않고 있다. 올 예산국회에서 증액이 요구된 사업은 4000건이 넘는다. 액수로도 당초 예산의 10%에 해당되는 40조원을 상회한다. 일부 의원들이 지역구 사업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복지 예산까지 삭감하는 행태에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쪽지 예산’을 보다 근본적으로 차단하기 위해서는 예산 심의 과정이 공개돼야 할 것이며, 아울러 예산 심의 과정에서 ‘증액 결정’이 이루어질 수 없도록 관련 법규를 개혁할 필요가 있다.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는 지난 22일까지 감액 심사를 마무리 짓고 현재는 증액 심사를 하고 있다. 헌법 제57조에 “국회는 정부의 동의 없이 정부가 제출한 지출예산 각항의 금액을 증가하거나 새 비목을 설치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으나, 아예 국회의 예산심의 과정에 ‘감액’은 할 수 있으나 ‘예산 증액’을 할 수 없도록 규정하는 방안도 강구할 필요가 있다.
기획재정부는 지난달 국회의원들이 국회 상임위나 예결위를 통하지 않고 비공개적으로 예산을 요구하는 ‘쪽지 예산’을 부정 청탁으로 간주한다는 유권해석을 내놓으면서, 2회 이상 반복하면 ‘청탁방지법’ 위반으로 기관장에게 신고하기로 한 바 있다. 청탁방지법은 당초 행정부 공무원만을 대상으로 구상된 것이나 입법부 의원들도 자발적으로 참여해 국민 신뢰를 회복하기를 기대한다.
촛불민심의 실체는 대통령의 진퇴를 넘어 우리사회의 총체적 개혁 요구다. 국회의 투명한 예산심의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쪽지 예산의 구태는 촛불민심에 대한 배신인 것이다.
이종수 한성대 명예교수·행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