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전쟁과 여성--알렉시예비치 작품을 읽고
몇 해 동안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작품에서 기대한 만큼의 감동을 느끼지 못한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번역본을 읽는 데서 오는 전달의 불충분함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올해는 달랐다. 지면을 통해 본 수상 소식만으로도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수상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1948년 우크라이나 태생)는 기자 출신으로 소설가나 시인이 아닌데도 노벨문학상을 받는다는 점이 특이하였고 무엇보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라는 대표작(1985년 초판 발간)의 제목이 흥미를 끌었기 때문이었다.
틈나는 대로 구해 보리라, 하고 마음먹었지만 다른 일에 밀려서 한동안 잊고 있다가 어느 날 우연히 발이 닿은 서귀포 어느 서점에서 신간을 둘러보던 중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아, 이거구나, 하면서 사서 바로 읽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5백 페이지가 훨씬 넘는 분량도 그랬고 처음 접하는 이야기라 한 줄 한 줄 글을 읽어가며 상념이 많아져 그리 빨리 읽을 수가 없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조금씩 읽다 보니 열흘은 더 걸린 듯하다. 첫 장을 끝내고 드는 생각은 이 작품은 노벨문학상보다도 노벨평화상을 받아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6.25를 겪거나 월남전에 참여했거나 하여 전쟁의 참상을 직접 겪은 이들을 빼고, 이 책의 독자는 대부분 전쟁에 관하여는 책이나 영화, 텔레비전 뉴스를 통하여 간접 체험을 하였을 뿐일 것이다. 필자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 실제로 2차 대전 중 독일을 상대로 싸웠던 구 소련인들이 자신들의 체험을 작가에게 생생하게 전달해준 것을 작가의 관찰과 함께 그대로 기록한 것이어서 정말 전쟁터에서 직접 보는 듯한 느낌을 주며 그만큼 큰 감동을 받게 된다. 인간이 벌이는 전쟁이란 것에 대해 지금까지 이처럼 생생하게 느껴보지는 못한 것 같다. 이 책의 독자들은 이런 생생한 전쟁터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정말 전쟁이란 것은 해서는 안 되는 것이구나, 하고 깊이 생각할 것이다.
작가는, 진실로 전쟁이 무엇이며 왜 전쟁이 일어나야 하는가에 대한 젊은 시절의 의문으로 시작하여 전후 30여 년부터 시작하여 평생 동안 구 소련 각지를 찾아다니면서 전쟁에 참여했던 여자들을 만나 그네들의 경험을 물어보았다. 그들은 전쟁터에서 생긴 온갖 트라우마로 그동안 남에게 말하지 못하거나 말하고 싶지 않았던 그들만의 이야기를 역사의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어렵사리 작가에게 이야기해준다. 끝내 이야기를 못해주겠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런 전쟁터의 생생한 증언을 채취한 노력만으로도 작가는 노벨평화상을 받을 만한 일을 했다고 본다.
전쟁은 남자들이 만들어내는 것이지만 실제로 전쟁에서는 수많은 여자들이 동원될 수밖에 없다. 여자들이 잘하는 간호, 세탁, 취사와 같은 분야에서 일할 뿐 아니라 통신병, 저격수, 전차병, 조종사 등 실전에도 참여한다. 이미 많이 죽어나간 남자들을 대신하여 전쟁터에 나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기도 하였고, 조국애와 복수심에 불타 전투에 참여하기를 적극적으로 원하여 전쟁터에 나간 경우도 많다. 아버지와 딸, 어머니와 딸, 형제자매들이 함께 전쟁에 나가기도 한다. 남자가 거의 없는, 늙고 어린 여자들만 남아서 사는 동네도 생긴다. 전쟁터의 참상에 대해서 굳이 이 자리에서 길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소련의 대독일 전쟁이 특별하게 다가온 것은 15만명에 가까운 그 많은 여 전사(戰士)들이 거의 다 15세내지는 18세의 소녀들이었기 때문이다. 이 소녀들은 대부분 자원해서 입대하거나 군 기관의 불허에도 불구하고 징집대열에 몰래 섞여들어 가면서 자연스럽게 입대한다. 그것도 잘 안 되면 동네 숲으로 들어가 빨치산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그만큼 학교나 당원 교육을 통해 당시 스탈린 정부로부터 주입된 공산주의 사상과 조국애가 깊이 소녀들의 머릿속에 뿌리박혀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전쟁 초반에 모스크바 코앞까지 유린당한 상황에서도 조국이 승리해야 하고 또 승리할 것이란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싸웠고 그런 탓으로 더 처절하게 싸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전쟁의 참혹함은 남녀 다 마찬가지지만, 여성만이 겪을 수 있는 전쟁터의 비인간적인 경우도 많다. 하나만 예로 들어본다. 한 전차 소대가 독일군에 쫓기다가 늪지에 빠진다. 전차도 빠지고 기관총도 소총도, 모든 것이 늪에 잠겨 있는 상황에서 부근은 독일군이 탐색견까지 동원해서 수색을 하고 있다. 전쟁터에 와서 아이를 낳은 여자 대원 하나가 아기를 안고 있는데 아기 울음소리가 나면 발각되어 전원이 몰살할 절체절명의 순간에 아기는 춥고 배고파서 곧 울음이 터져 나올 판이다. 대원들은 모두 엄마 병사만 바라보고 있다. 한 순간 자기에게 쏠린 뭇시선의 의미를 깨달은 아기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보자기에 싸인 아기를 그대로 늪 속으로 밀어 넣는다. 독일군이 멀리 가고 늪에서 나온 대원들은 오랫동안 차마 그 여자 대원을 쳐다보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미 수천 번도 넘는 전쟁이 이 땅에서 벌어졌음에도 전쟁은 여전히 인간사에서 가장 풀기 어려운 비밀 중 하나로 남았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 나는 거대한 역사를 인간이 가 닿을 수 있는 작은 역사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야 뭐라도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할 말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탐색하기 간단해 보이는, 그리 넓지 않은 이 작은 영토--한 사람의 영혼의 공간--가 역사보다 더 난해하다. 알아내기 더 힘들다. 왜냐하면 내 앞에 있는 그건 살아 있는 눈물이고 살아 있는 감정들이기에. . . . 길은 오로지 하나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사랑으로 사람을 이해하는 것.”
작가는 전쟁터의 모든 이야기, 전쟁에 참여한 가정 내의 모든 이야기, 전쟁에 참여한 소녀와 여자들의 이야기를 충실히 캐묻고 완벽에 가까운 기록으로 남기지만 끝까지 전쟁이란 것에 대한 의문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인간사에서 전쟁처럼 불가사의한 것은 없을 것이다.
한편,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란 제목이 시사(示唆)하듯 여자들이라면 이런 참혹한 전쟁을 쉽게 일으키지 않을 것이란 생각도 해본다. 생명을 만드는 사람이 어찌 생명을 파괴하는 일을 벌일 것인가! 딱히 이 말을 하려고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책을 읽고 간단한 독후감이라도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데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그래도 가장 가깝게 느껴볼 수 있는 전쟁터의 생생한 이야기를 접하면서 작가처럼 전쟁에 대해 진정한 의문을 다시금 가져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리하여 생명을 잉태하고 낳는 거룩한 일을 맡은 어머니와 딸, 자매들이 전쟁의 온갖 참상을 겪지 않고 가정 내에서 온전히 살 수 있도록 특히 남성들이 노심초사해야한다는 점을 되새기고자 한다.
정 달 호 | 전 이집트 대사
(이 글은 2015년 12월 ‘자유컬럼’에 실린 것을 옮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