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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를 되돌아보다
올해 8월은 해방 80주년을 맞는 달이지만 동시에 히로시마 원폭 투하 80주년이 되는 달이기도 합니다. 해방은 8월 15일이고 원폭 투하는 8월 6일, 바로 오늘입니다. 1945년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각각 표적으로 하는 원자폭탄 투하의 결과로 일본이 항복을 하고 이에 따라 조선이 일제의 강점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원폭 투하와 우리의 해방은 인과관계로 서로 맞물려 있다고 하겠습니다. 히로시마 원폭 이야기를 쓰게 된 것은 약 7만 명에 달하는 히로시마 원폭 조선인 피해자의 70, 80퍼센트가 경남 합천 출신이라는 신문기사(중앙일보 7월 14일 자)가 눈길을 끌었기 때문입니다.우연이라 치더라도 합천 사람들로서는 참으로 억울하고 기가 막힐 일입니다. 1945년 당시 히로시마에서 만나는 조선 사람에게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보면 거의 다가 합천이라고 했을 정도로 합천 사람들이 히로시마에 많이 가 있었던 것입니다. 기사를 통해 합천에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 복지관과 자료관, 또 위령각 등 추모 시설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지난달 13일에는 요코타 미카(橫田美香) 히로시마 부지사가 합천에 와서 원폭 피해자 위령각에 참배했다고 합니다. 인도주의 정신에 입각한 일본 측의 우의 표명에도 불구하고 한인 원폭 피해자 배상 문제가 여전히 답보 상태에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이 기사를 보면서 십수 년 전 제가 유엔 관련 일로 히로시마에 가서 히로시마 시장을 만난 후 히로시마 평화기념관(자료관)을 참관한 일이 떠올랐습니다. 평화기념관에서 당시 피해 상황과 피해자 사진들을 보면서 원자폭탄이 야기한 극도의 처참함과 반인간성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전쟁이나 재해 현장과 비교할 수 없는, 상상을 초월하는 처절하고 참담한 모습이었습니다.1945년 8월 6일, 6시간 거리의 티니안섬(마리아나제도)에서 출발한 B29 슈퍼포트레스는 리틀보이(Little Boy)로 명명된 원자폭탄 1개를 싣고 히로시마로 날아가 고도 9,400미터에서 폭탄을 투하하였으며 폭탄은 44초 후 580미터 상공에서 폭발하였습니다. 바람 때문에 당초 목표한 군사 시설에서 250미터쯤 떨어진 병원 상공이었습니다. 아침 8시 15분이었습니다. 군수시설과 병력이 집중돼 있던 인구 35만의 히로시마는 번쩍하는 섬광과 화염으로 순식간에 허물어지면서 불바다로 변했습니다.
사진 1 원폭 투하 직후(왼편 히로시마, 오른편 나가사키). 출처 네이버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내에 있는 평화기념관은 원폭 투하 지점(그라운드 제로)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습니다. 부근에 원폭돔(Dome)이라 불리는 건물도 있는데 당시 산업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던 이 건물은 주변이 원폭으로 다 파괴된 가운데 유일하게 골조가 온전히 남아 있어 1996년 이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돼 있습니다.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에는 희생자 위령비가 있는데 2016년 방일한 오바마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참배하기도 하였습니다. 공원 한쪽 구석에는 한인 희생자 위령비도 세워져 있습니다. 저도 이 위령비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우리 원폭 희생자를 추모하면서 일제의 조선 식민지화, 태평양전쟁의 과정 등 가까운 역사와 함께 세계 최고 과학자들에 의한 원자탄의 개발과 사상 초유의 원폭 투하를 생각하며 만감이 교차하였습니다.한편으로는, 일본이 스스로 전쟁을 일으키고 자신의 감당 능력을 훨씬 넘어 확전을 기도한 결과로 패배한 것인데 히로시마 원폭 피해만을 부각시키고 전쟁의 책임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은 것은 온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본이 역사적 책임을 인정하거나 과거의 잘못에 대해 사과하기를 꺼린다는 것을 이 기회에 다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전쟁에서 패배하였지만 토쿄 등지에 전쟁의 과정과 책임 등 역사적 경위를 재현한 전쟁기념관을 별도로 세워놓았다면 후대를 위한 교육에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히로시마'가 남긴 원폭의 영향과 핵무기에 대한 평소의 관심 때문인지 지난 연말 싱가포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공항 서점에서 얼핏 눈에 띈 '히로시마의 의사(The Doctor of Hiroshima)'라는 책을 펴보지도 않고 그대로 사 가지고 왔습니다. 이 책은 원폭 희생자인 히로시마의 한 의사가 원폭 투하 당일부터 한 달 반 가까이 거의 매일 쓴 일기를 책으로 엮은 것입니다. 너무나 처참하고 끔찍해서 몇 페이지 읽고 덮어두었다가 요즘 다시 펼쳐보고 있습니다.
'미치히코 하치야'라는 의사의 일기 첫 페이지는 원폭 투하 당일 본인이 겪은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가 아침에 일어나 정원에 나가 물을 주려는데 생전 처음 보는 매우 강렬한 빛에 놀라서 살펴보니 섬광으로 인해 자신의 옷이 다 타 없어져 알몸이 돼 있었고 신체 각 부위도 상처로 만신창이가 돼 있었습니다. 그는 당황하고 고통스럽지만 억지로 몸을 움직여 아내와 함께 소속 병원까지 갑니다. 가는 길에는 폭탄이 터지면서 생긴 순간적 섬광과 불길로 형체를 알 수 없게끔 손상되거나 타버린 희생자들의 신체가 더러는 사지가 분리된 채로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자기 집은 물론 병원을 포함한 주변은 다 파괴되어 잿더미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2주쯤 후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고 나서는 오로지 임시 병원에서 지내면서 주로 방사능 환자들을 돌보았다고 합니다.
사진 2 '히로시마의 의사' 책 표지
이처럼 대재앙을 야기한 사상 초유의 원폭 투하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당시 원자폭탄 사용으로 빠른 종전이 가능함으로써 양측의 엄청난 인명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는 주장과 함께 원자폭탄을 사용하지 않고도 충분히 전쟁을 이길 수 있었다는 주장이 대립합니다. 방사능을 수반하는 원자폭탄이라는 미증유의 초강력 살상무기의 사용은 이처럼 윤리적, 법적 문제를 수반할 수밖에 없으나 히로시마(우라늄 탄)와 나가사키(플루토늄 탄) 원폭 투하가 태평양전쟁을 더 빨리 종식시켰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종전 즈음 일본은 도쿄를 비롯한 64개 도시에 연일 이어진 야간 공습, 특히 화염탄 폭격(fire bombing)을 받아 초토화될 지경에 처해 있었으며 오키나와를 점령한 연합국 군대가 큐슈 등 일본 본토를 침공할 것에 대비하여 국가 총동원령하에 결사 항전 중이었습니다. 인적 물적 전쟁 자원은 바닥에 가까운 상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7월 26일 연합국이 포츠담선언을 통해 던진 최후통첩에 대해, 무조건 항복 대신 끝까지 본토 수호를 위한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런 긴박한 상황에서 원폭 투하가 아니었으면 전쟁이 언제 끝났을는지 모를 일입니다.오늘날 국제전략 문제를 논하면서 핵무기 문제를 빼놓고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 또 핵무기 문제를 얘기하면서 히로시마 원폭 투하가 가져온 엄청난 인적 물적 파괴와 특히 방사능 피폭자가 평생 견뎌내야 할 고통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북한의 김정은과 러시아의 푸틴은 기회 있을 때마다 핵무기 사용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가공할 일입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의 처참한 결과를 생각하면 이보다 수십 배 수백 배 더 파괴력이 있는 현대 핵무기를 사용한다는 것은 제정신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인류는 전쟁이 없는 평화를 희구해왔으나 전쟁은 인간의 조건인 듯 도처에 상존하며 전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시도는 온갖 가공할 핵무기의 개발에까지 이르렀습니다. 핵무기는 '공포의 균형'을 통해 전쟁을 억제하는 기능을 하기도 하지만 우발적인 사용 등 온갖 위협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핵무기의 개발과 사용을 억제하는 국제적 노력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80년 전 오늘의 '히로시마'가 인류에게 주는 교훈은 더 이상 핵무기 사용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