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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5-04-25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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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발언대] 젊은 시절의 멘토 유택렬 화백 *정달호 회원이 2025.04.22자 자유칼럼에 투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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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의 멘토 유택렬 화백 

 

젊은 날 진해에서 보낸 해군 시절, 육상 근무 2년 동안 퇴근 후 가까운 화실에서 제게 기초 데생을 가르쳐 주시던 유택렬(劉澤烈, 1924~1999) 화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2층 건물 위층에 있는 그 화실 아래층에는 '흑백다방'이라는 클래식음악 감상실을 겸한 카페가 있어 저는 아래층에서 음악을 듣고 위층에서 데생을 배우는 식으로 이곳을 자주 드나들었습니다. 말하자면 음악과 미술 감상을 통해 문화적 소양을 쌓을 풍부한 기회를 준 공간이었습니다. 데생 수업은 6개월쯤 하다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그만두게 되었지만 당시 유 화백으로부터 받은 영향은 평생 계속되었다는 생각입니다.

 

1973년부터 전역하기 전 2년 동안 저의 영외 숙소는 흑백다방 건너편 집이어서 화실에 다니기에도 매우 편리하였습니다. 방사형 도시인 진해의 한 중심지역 큰 6거리 모퉁이에 위치한 흑백다방은 1950년대 중반부터 예술인들이 많이 드나들던 진해의 문화적 상징 같은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활발하고 다양한 예술활동을 펴오던 추상미술가 유 화백의 둥지를 중심으로 모여든 예술가들에는 6.25전쟁 중 피란차 부산, 마산, 통영, 진해 등으로 내려와 활동하던 인물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유택렬 화백 자신도 전시 중 흥남철수 작전 때 남한으로 와 거제 수용소를 거쳐, 일제 때 해병으로 잠시 근무한 인연을 따라 진해에 정착한 예술가입니다.

 

일제 강점기의 삶, 해방, 이어 전쟁이라는 파란 많은 시대에 어렵게 청춘을 보낸 그는 함경남도 북청 태생으로서 '북방 고구려인의 기상'을 품은 직선적이며 열정적인 인물로 기억합니다. 농업학교를 나와 독학으로 화가가 된 분인 만큼 화풍이 개성적이고 독창적이어서 처음 그의 작품들을 접하면서 강렬한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 저는 대학에서부터 가끔 사 읽던 타임지() 아트 섹션을 통해 미술에 대한 관심을 높여 오고 있을 때였는데 그 시절 유 화백과의 만남이 평생 저의 예술에 대한 관심을 지탱하게 해준 계기가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는 서울에서 활동하는 많은 예술가들과도 알고 지냈지만 진해, 부산, 마산, 통영 밖으로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작가였습니다. 중앙 화단과는 멀리 떨어져 지냈어도 일본 미술 잡지 등을 통해 세계적 미술 사조를 따라가면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예술적 행로를 개척한 분입니다. 저는 진해에 체류하는 2년 동안 유 화백으로부터 미술과 음악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1975년 진해를 떠난 이후로는 만날 기회가 별로 없었습니다. 제가 직업상 해외를 많이 다니다 보니 자연 선생님과는 멀어지게 되었으며 이따금 간접적으로 소식을 듣는 편이었습니다.

 

199975세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도 해외에 있느라 뒤늦게 들었을 뿐인데 세월이 지남에 따라 그분에 관해서는 거의 잊고 지내왔습니다. 새삼 유 화백을 소환하게 된 것은 작년 2024년 겨울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를 회고하는 큰 전시가 "유택렬과 흑백다방 친구들'이라는 제목으로 경남도립미술관에서 열렸기 때문입니다. 제가 선생님으로 모시던 예술가의 회고전이 열린다는 사실 자체도 의미있게 다가왔지만

 

그보다도 그분이 제가 진해를 떠난 후 건강을 되찾아 생애 끝까지 작품활동에 헌신하였다는 사실이 더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전시 홍보물에 실린, 당시 보지 못한 그분의 나중 작품들을 보면서 역시 대단한 예술가였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는 프랑스 파리에서도 한 차례 전시를 가지기도 하였습니다.

 

'가족' '기다리는 사람들' '천지' 등 고향을 등지고 내려온 그가 가질 수밖에 없었던 '그리움'을 표현한 디아스포라적 작품들에서 차차 '돌멘(dolmen)' 시리즈, '부적(amulette)' 시리즈 등 우리 전통문화에 바탕을 둔 주제에 집중한 그는 '경남지역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불릴 만큼 평생 추상미술에 예술적 정열을 바쳤습니다. 그는 1981년 서울에서 최초 개최한 전시에 맞춰 일부러 기록한 작가노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처음부터 원시미술과 샤머니즘에서 우리 조형의 본질을 찾으려고 애썼다. 용에서부터 고인돌, 단청, 부적, () 등은 내가 헤맨 분야들이다. 처음에는 점차 이미지에 접근해가는 방법을 사용했고 근자에는 무의식 상태의 조형을 많이 사용하는 셈이다. 무당이 쓰는 부적은 무의식 상태의 조형이며 본성적 행위의 흔적이다. 앵포르멜(informel)과 우리의 서()나 부적은 유사한 듯하나 서로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이런 주제들은 그가 고향인 북청과 그 주변에서 본 선사시대 유물이나 토기, 고구려 유적 등과 어린 시절 부적의 힘으로 병이 낫게 된 개인적인 경험 등에서 받은 영감이 기반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의 작품들과 관련해 경기대학교 박영택 교수는 "유택렬은 동양 회화나 서예, 부적 등에서 핵심적인 기운생동의 선, 명상적이고 주술적이자 보이지 않는 힘을 가시화하는 선의 매력을 어떻게 서구 추상미술의 틀 안으로 수용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고 본다. 막연한 전위나 실험 내지 앵모르멜의 자취를 답습하는 게 아니라 한국적인 냄새가 짙은 작품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유택렬의 그림에는 내포돼 있다"고 했습니다.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를 할 입장은 아니지만 젊은 시절 그와 가까이 지내면서 겪었던 그의 인간과 삶이 그대로 작품에 녹아 있는 느낌을 강하게 받습니다. 어느 화가의 경우에도 대체로 해당되는 말이겠지만 ''유택렬의 작품은 바로 유택렬 자신이다''라고 말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의 삶, 강렬한 개성, 독창적인 사고, 끝을 볼 때까지 집중하는 추진력 등이 그렇습니다. 그가 제게 데생을 가르칠 때 항상 굵은 선을 보라고 하였고 평소 대화에서도 긴 호흡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시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돌이켜보면 그분이야말로 저에게 최초의 멘토였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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