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선진국으로 가는 길 (1) 정달호 회원이 2025.01.03 자유칼럼에 게재한 글입니다. > 청류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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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5-01-05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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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발언대] 정치 선진국으로 가는 길 (1) 정달호 회원이 2025.01.03 자유칼럼에 게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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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선진국으로 가는 길 (1) 2025.01.03

 

지난달 초 비상시국의 장면들은 참으로 아찔하고 어처구니없고 우스꽝스럽기도 하였습니다. 머릿속 아득한 기억으로 남아 있던 계엄령이라는 무서운 맹수가 한밤중에 여의도 등 시내 곳곳으로 뛰어들어 잠시지만 온 국민을 불안과 공포에 떨게 하였습니다. 위기에 맞선 시민들의 지혜와 용기로 가까스로 불행한 사태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위대한 국민임을 증명했습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후진적·퇴행적 정치행태가 계속된다면 유사한 사태가 또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겠습니다. 지금처럼 정치 혼돈과 경제 불안정이 계속된다면 우리는 여태까지 이룩한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 최악의 정치 위기를 최선의 기회로 삼아 우리 정치도 다른 분야처럼 선진화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은 세계 모든 나라가 부러워할 만큼 거의 모든 면에서 선진화되었는데 두드러지게 정치만 예외로 남아 있어 성장과 발전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남들보다도 우리 스스로 매우 부끄러워해야 할 공공연한 치부이자 치명적인 약점입니다. 무엇보다 정치가 안정돼야 안정기조하에 국태민안과 국리민복을 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여전히 정치가 만사일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정치가 잘돼야 매사가 잘 굴러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정치는 왜 퇴행의 길을 반복하고 있을까요? 정치학자나 평론가들은 주로 헌법상 권력구조와 선거제도에서 그 이유를 찾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권력구조와 선거제도만 잘 만들면 정치가 안정되고 선진화될 수 있을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우리나라 정치 후진성의 근본적인 이유는 정치와 국민 간의 괴리(乖離)라고 봅니다. 정치는 국민을 외면한 채, 또 국민은 정치를 외면한 채 서로 겉돌고 있는 형국입니다. 바꿔 말하면 정치과정(political process)에서 '그들만의' 정치 놀음만 요란할 뿐 정작 국민의 진정한 정치 참여는 실종 상태라는 것입니다.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에서 투표율이 낮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민주정치의 토대인 정당 활동이 국민과 동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국민들이 정치에서 동떨어져 있는 상황(political apathy)은 세계적으로 민주주의의 쇠퇴를 가져온 보편적인 현상이지만 우리의 경우 깨어 있는 국민인 지식인마저 정치를 경원시하고 있습니다. 우리 지식인들은 정치 비판에는 강하나 정치 참여에는 약합니다. 평소 정치과정에서 스스로를 소외시킨 채 정치판의 동향에는 비상한 관심을 보이면서, 잘해야 그저 시국선언을 하거나 거리로 몰려가 시위를 하는 것은 진정한 정치 참여가 아닙니다. 엘리트로 불리는 국회의원들이 거리 시위를 추동할 뿐 아니라 국가 최고 공론의 장인 의회를 박차고 나가 걸거리 시위에 참여하는 것도 저질 정치의 표본이라 하겠습니다. 정치권이 정치판의 논리에 갇혀 갈팡질팡하는 동안 국민들은 대중매체를 통해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스포츠 중계 보듯이 따라갑니다. 몇 사람이라도 모이면 보고 들은 정치판 이야기를 나누면서 흥분하거나 냉소하거나, 때로는 언성을 높여 싸우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정당이나 지도자급 정치인에 대한 선호에 따라 진영이 나뉘어 양 진영은 죽기살기로 싸웁니다. 정책을 놓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진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서로 싸우는 것입니다. 친한 친구 사이도 진영이 다르면 만나기 싫어할 정도로 진영의 편가름은 우리 생활 전반을 관통하고 있습니다. 어떤 정책이 자신과 국민의 삶에 바람직한가보다는 어느 당, 어떤 지도자를 선호하고 지지하느냐가 선택의기준이 됩니다.

한편 대중매체는 정당의 정책을 분석하고 평가하기보다는 그 정당의 속내나 정당 지도자가 내놓는 온갖 자극적인 언행을 밀착 취재하고 공적으로 큰 의미가 없는 가십성 기사를 부각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고된 일상 속에서 쉽게 읽을 수 있는 선정적 기사가 눈과 귀를 끄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 결과 '정치 한다'는 사람들은 대중매체에 많이 언급될수록 득표에 유리한 것으로 보고 인기성 언행을 일삼으며 포퓰리즘적 정책을 주창하기 일쑤입니다. 더욱이 판박이 정치판 소식에 지친 국민들은 유튜브나 팟캐스트 같은 현란하고 무책임한 정보 소스에 더욱 끌리게 됩니다. 왜곡된 진실과 선동이 난무할 수밖에 없습니다.

민주주의라 하더라도 정당 정치가 국민 생활에 뿌리박지 못하고 정쟁에만 매몰되는 상황에서는 25세기 전 아리스토텔레스가 경고한 이른바 '중우(衆愚)정치'가 되고 맙니다. 일반 국민으로서 정당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적 정치과정에 참여하지 않는 현상은 아마도 조선시대부터 내려오는 비뚤어진 정치문화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백성을 제대로 보살피지 않는 정치권에 대한 불신, 잘못하다가는 일가족이 화를 입을 수 있다는 우려, 이에 더해 위선적인 지도층의 기득권 나눠먹기 등으로 인해 옛날부터 국민은 정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를 선호해 온 것으로 봅니다. 이런 정치 참여 기피 현상은 여전히 우리의 DNA에 스며 있을 것입니다.

조선시대 이래의 권위주의적 정치문화는 대통령이 제왕처럼 군림하고 대통령을 제왕처럼 인식하는 잘못된 습관에도 남아 있습니다. 흔히 비판의 대상이 되는 '제왕적 대통령제'는 사실 헌법상의 문제라기보다는 정치문화의 소산입니다. 왕조국가의 전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탓으로 은연중 대통령을 왕처럼 인식하는 문화가 기성세대를 중심으로 어느 정도 잔존하고 있는 데다가 이승만, 박정희를 필두로 김영삼, 김대중, 전두환 등 카리스마가 강한 지도자들이 그런 식의 통치 모델을 남긴 것도 한 요인이라고 하겠습니다. 카리스마를 과시하는 지도자는 법치를 무시하는 함정에 빠지기 쉽다는 것을 우리 역사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의 정치판은 득표율 차(55% 45%)에 비해 기형적으로 많은 의석을 차지한 거대 야당과 근소한 표 차(0.73%)로 대권을 장악한 제왕적 대통령 간 강 대 강 대결 구도입니다. 거야소여(巨野小與)의 상황에서 의회는 의회대로, 대통령은 대통령대로 각기 국민으로부터 부여받은 권력임을 내세워 승자독식의 관행에 빠집니다. 서로 경쟁하듯이 권력을 오남용하면서 안보든 민생이든, 그 어떤 사안에서도 정파적, 정치적 이해관계를 위주로 상대방을 굴복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민주정치의 기본 원리인 삼권분립은 무시되고 민주주의의 일상적 작동 원리인 타협과 협상은 사라지고 맙니다.

정치의 후진성에 대한 사회문화적 요인을 하나 더 든다면 우리 국민에게는 토론과 숙의를 통하여 결론에 도달하는 것보다는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고 상대방을 설득하고 굴복시켜려는 성향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조선시대 지도층이 성리학적 이론과 이념에 대한 충성을 기준으로 당파를 나눠 대치하던 잘못된 전통이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가까이서 겪어온 가부장적 권위주의의 잔재도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토론에서 실용적으로 타협을 추구하기보다는 논쟁에서 질 경우 체면이 손상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끝까지 버티거나 싸우다가 결국 평행선으로 치닫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무엇이 사회에 옳고 바람직한가보다도 무엇이 자신과 우리 편에 유리한가를 위주로 논의가 진행되게 마련입니다. 올바른 결론이 나오기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사회적 자본'의 결핍이 더해짐으로써 우리의 정치는 후진적 행태에서 벗어나기가 더욱 어렵게 됩니다. 사회적 자본이란 사회학 용어로서 일반에게는 다소 생소한 개념이지만 쉽게 말하면 공동체의 법규를 지키는 준법의식, 사회구성원 간의 배려와 신뢰, 공동체가 필요로 할 때 양보하고 협동하는 자세 등을 말한다고 하겠습니다. 여러가지 연유로 우리 사회는 각 분야에서 위아래를 막론하고 법과 규칙을 지키지 않고 나아가 법을 무시하는 풍조가 만연해 있습니다. 이웃 간에도 공연히 의심하고 경계함으로써 신뢰가 쌓이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큰 곤란이 닥쳐올 것으로 예상되지 않는 한 서로 양보하고 협동하는 습관이 정착돼 있지도 않습니다.

준법은 위에서부터 법을 지키지 않는 게 더 큰 문제입니다. 법을 만들어 놓고 스스로 지키지 않는 것은 국회의원이 가장 심하고 그다음, 지위가 높은 공직자 순으로 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선거에 나온 후보 검증이나 국회 인사청문회 때마다 식상할 정도로 지도층의 불법, 위법 행태가 드러납니다. 당사자들은 '다 그러하니 나도 그리하게 되었다. 죄송하다'라는 말 한두 마디로 넘어가고 또 그렇게 받아들여집니다. 그러니 국민들이 법이나 규칙을 지켜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게다가 사회 각 분야의 상층부는 오랜 세월 쌓아온 기득권을 지키려고 온갖 수단을 동원하다가 위법·불법의 무리수를 두게 됩니다.

후진적 정치문화와 사회적 자본의 결핍으로부터 정치의 후진성이 야기된 것이므로 이를 넘어서야 진정한 선진국으로 갈 수 있습니다. 이 두가지 장애요인을 개선하는 데는 시일이 걸릴 뿐만 아니라 총체적, 집단적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첫째로, 변화한 현실에 맞게 조속히 개헌을 하고 승자독식의 선거법을 개정하는 등 정치제도를 개선하고, 둘째 민주주의 본연의 정당 활동 활성화 등을 통한 국민의 적극적 정치과정 참여를 진작하고, 셋째 학교교육과 사회교육을 통해 사회적 자본 결핍 문제를 개선해 나가야 합니다. ( 2편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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