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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10-29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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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발언대] 헤밍웨이의 흔적을 찾아 * 정달호 회원이 자유칼럼에 게재(2020.10.26)한 글입니다

본문

 

헤밍웨이의 흔적을 찾아

  * 원 제목에 금지어가 포함되어 있어 게재가 아니되는 관계로 '찾'으로 제목을 변경한 것임.

2020.10.26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1899~1961)에 대해서는 무수히 많은 글이 나와 있는데 문학도도 아닌 사람이 새삼스레 그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가, 하고 의아해하실 분들이 있을 듯합니다. 그의 작품을 꽤 읽긴 했지만 저는 그의 문학적 업적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할 이야기는 없습니다. 다만 젊은 시절에 '노인과 바다'를 읽은 감명이 오래 남아 있던 때문인지 몇 년 전 책방에서 우연히 눈에 띈 그 작품 영어본을 사 와서 읽기도 했습니다. 또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의 감동이 가슴속 깊이 파고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도 그 작품에 생각이 미치면 원작자인 헤밍웨이 못지않게 게리 쿠퍼와 잉그리드 버그만의 청순한 로맨스 장면이 떠오를 정도입니다.

헤밍웨이의 작품은 상당 부분 영화화된 것으로 압니다. 소설뿐 아니라 영화를 통해서까지 이렇게 대중적 인기를 누린 작가는 흔하지 않을 듯합니다. 그의 작품을 읽지 않고 영화만 보고서도 작가를 좋아할 수 있으며 또 영화를 보고 그 감동을 되새기기 위해 원작을 찾아 읽을 수도 있습니다. 작품에 점점 깊이 빠지면서 자연히 작가의 삶에 대해서도 관심과 흥미를 갖게 되면 결국 헤밍웨이라는 인간의 매력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은 그럴 형편이 아니지만 그전에는 젊은이들이 헤밍웨이의 흔적을 찾아 쿠바의 아바나로 떠나는 일이 많았습니다. 젊은이들뿐이 아닐 것입니다. 한번은 중년의 지인이 아바나로 가는 그룹투어를 엮고 있는데 저보고도 관심이 있냐고 물어온 적이 있습니다. 헤밍웨이가 젊은 시절 오래 살았던 곳이자 그의 대표적 뮤지엄이 있는 플로리다의 키웨스트(Key West)에는 성지순례처럼 연중 많은 이들이 와서 그의 흔적을 둘러봅니다. 그의 뮤지엄은 고향인 시카고 교외의 오크파크(Oak Park)와 생의 후반 이십여 년이나 살던 아바나 교외의 꼬히마르(Cojimar)에도 있습니다. 그의 마지막 거처이자 생을 마감한 곳은 아이다호의 케첨(Kechum)이란 작은 도시입니다. 

저는 위에 든 그 어느 곳에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헤밍웨이가 파리에 자주 가서 오래 머문 편이지만 저는 오래전 파리에 잠시 살면서 당시에는 그의 족적을 찾아볼 생각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아프리카에서 한두 번, 스페인에서 두어 번 그의 흔적에 가까이 닿아본 적이 있습니다. 아프리카는 1986년 출장지였던 탄자니아 아루샤(Arusha)에 갔을 때였습니다. '킬리만자로의 눈'을 쓴 헤밍웨이는 생전에 탄자니아, 케냐를 포함해서 아프리카를 두 번 여행하였습니다. 두 번째 여행에서는 비행기 사고로 크게 다치기도 하였지요. 아루샤에서 본 킬리만자로 만년설의 모습은 정말 환상적이었습니다. 근래 뉴스 화면을 보니 은빛 주발을 엎어놓은 듯한 정상의 그 아름다운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희끗한 누더기의 모습일 뿐이었습니다. 헤밍웨이가 지금 이를 목격한다면 참으로 안타까워할 것 같습니다.

또 한 번은 2005년 케냐의 나이로비에서였습니다. 시내 중심가 노포크(Norfolk) 호텔 테라스에서 차 한잔을 시켜놓고 앉아 있는데 벽에 파이프를 문 헤밍웨이의 삽화가 걸려 있는 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혹여나 해서 웨이터에게 특별한 연유가 있는지 물었더니 헤밍웨이가 여기에 묵으면서 자주 이 테라스에서 차를 마시곤 했다는 겁니다. 헤밍웨이는 생전에도 큰 인기를 누린 만큼 어디를 가도 그가 머물었던 곳에는 그 흔적들이 눈에 띄죠. 마치 유수한 식당에 가면 유명인사들의 사인이 든 방명록을 비치해 두고 그들의 방문 사실을 고객들에게 환기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스페인에는 1981년 인근 지역에서 휴가차 나왔다가 마드리드의 한 유명 광장에 있는 찻집에 들렀을 때였습니다. 벽에 헤밍웨이의 사진이 많이 붙어 있어 물어보았더니 그가 이 집에 자주 와서 포도주와 사과 조각을 섞은 상그리아(sangria)라는 음료를 즐겨 마시곤 했다 합니다. 상그리아는 그의 작품에 가끔 등장하는 음료죠. 그러고는 2014년엔가 다시 마드리드에 갔을 때인데 세고비아까지 자동차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안내자가 왼편의 큰 계곡(Navacerrado)을 가리키며 저기가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의 마지막 장면이 펼쳐지던 지점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주인공이 죽게 됨으로써 남녀가 생이별을 하던 그 장면이 생생하게 떠올랐습니다. 나중에 마드리드의 책방에서 굳이 이 책의 스페인어본을 사 와서 첫 부분을 사전 찾아가며 읽느라고 진땀을 뺀 일도 있습니다.

그날 관광을 끝내고 저녁을 먹으러 마드리드의 먹자 골목을 찾았습니다. 번잡한 광장의 한쪽 구석에서 밥을 먹다가 길가에 오래된 맥줏집(cervezaria)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관심을 보였더니 바로 그집이 헤밍웨이가 즐겨 찾던 맥줏집이라고 식당 주인이 일러주었습니다. 맥주 생각이 난 데다 주변 분위기가 좋아 좀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고 싶었는데 잘됐다 싶어 들어갔습니다. 주인에게 물어보니 헤밍웨이는 광장을 내다보는 창가 자리에 앉아 있곤 했다 합니다. 그래서 좀 기다렸다가 저도 바로 그 자리에 앉아서 맥주를 시켜 마셨죠. 흰 수염을 적당히 기른 그의 잘생긴 얼굴이 벽 한 구석에 붙어 있었습니다.

일반 여행객에 불과한 저마저도 이처럼 헤밍웨이의 흔적에 들뜨곤 했으니 그의 작품을 연구하는 문학도나 그의 매력에 푹 빠진 독자라면 일부러라도 그의 족적을 따라나설 법합니다. 그렇다면 헤밍웨이는 왜 이처럼 끊이지 않는 인기를 누리는 걸까요? 한마디로, 그의 작품 못지않게 그의 삶 자체가 하나의 로망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게다가 잘생기고 개성적인 스타일의 인간이라 남녀 공히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헤밍웨이의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의 삶이 곧 작가 자신의 삶으로 생각될 정도로 주인공과 작가가 엇갈려서 기억 속에 남아 있기도 합니다.

그의 삶을 보면, 헤밍웨이가 짧은 기자 생활을 하던 18세 때 1차대전이 발발했는데 정규 징집에 떨어지자 그는 현지 적십자에 신청하여 앰뷸런스 운전사로서 이태리 전선에 투입됩니다. 그리고 스페인 내전 때는 종군기자로 참여합니다. 이때의 경험들이 나중에 그의 작품의 기반이 되죠. 이런 그의 남다른 행동은 일찍이 몸에 밴 모험주의 때문일 것입니다. 단순한 모험이 아니라 신념에 따르기 위한 모험이라고 하는 게 맞을 듯합니다. 2차대전 때는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파리 해방 작전에도 종군하였습니다. 옆으로 빠지는 얘기지만 노르망디 상륙 후 군진지에서, 나중에 유명작가가 된 J. D. Sallinger 병사를 만나 그가 내민 '호밀밭의 파수꾼' 초고를 보고 좋게 평가해 준 일도 있습니다. (다큐영화 '샐린저' 참조)

그는 스포츠맨이기도 해서 사냥, 바다낚시, 보트 타기 등 모험적인 스포츠들을 좋아했습니다.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캠핑을 포함한 야외 스포츠를 배우고 즐겼는데 이런 경험이 바탕이 되어 평생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스포츠를 즐기고 자기가 좋아하는 곳을 골라 거기에 정착해 삽니다. 고교 때 교지 편집인을 한 적도 있어 그의 저널리스트적 기질은 타고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그의 저널리스트적 정신이 소설가로서의 성공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네 번 결혼하고 세 번 이혼한 그의 여성 편력 또한 보통 사람으로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개인사의 특별한 대목입니다. 세 번째 부인인 마사 젤혼(Martha Gellhorn)도 기자인데 키웨스트에 왔다가 동네 바에서 헤밍웨이를 만나 서로 사랑하여 나중에 결혼하게 되었다지요. 마사 젤혼과는 스페인 등지에서 종군기자로 같이 활동하기도 하였습니다. 2012년에는 헤밍웨이와 그녀의 삶에 관한 영화 'Hemingway & Martha Gellhorn' 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퓰리처상과 노벨문학상을 받은, 성공한 62세의 작가가 자살로 생을 끝맺었다는 허망한 사실이 풍부하고 격정적인 삶과 극적인 대조를 이룸으로써 그의 삶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작품을 이루었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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