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내다본 2020 총선: 찍을 곳이 없다! 이종수
답답하다! 빛이 보이지 않는다. 거대 정당들은 눈앞에 보이는 것을 도무지 믿지 않고 듣지 않으려 한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원하는 것만 보고 막무가내로 우기기를 일삼는다고는 하나, 성찰(省察)도 없고 비전도 없다. 반성(反省)하는 시늉도 없다. 당장 총선이 몇 달 앞으로 다가왔는데 좁은 시각의 정치공학에 매몰돼 온 몸이 중병 걸린 것 걱정하지 않고, 국민의 눈을 잠깐 속이기 위한 당장의 화장효과(化粧效果)에만 매달린다. 결국 찍을 곳이 없다.
2020년 4월 15일 치러질 21대 총선을 앞두고 전개될 정국을 역산(逆算)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연말연시가 가까워지면 거대정당들은 공천권을 둘러싼 ‘죽기 살기 식’ 다툼을 벌일 것이다. 비당권파를 중심으로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 구성 얘기가 벌써부터 솔솔 나오고 있다. ‘비대위’ 구성 얘기는 비단 비당권파에서만 나오는 건 아니다. 현재의 ‘간판 얼굴’로 선거 치르는 것이 도움 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한 잠재적 후보자들은 짠하고 ‘미륵(彌勒)’이 나타나기를 기대한다.
집권 여당은 당내 화합을 강조하기 위해 당내 분란을 힘으로 누르면서 태연을 가장하고 있으나 선거가 다가올수록 원심력이 커질 것으로 보인다. 소위 조국 사태를 거치면서 국민들에게 보이지 말아야 할 것을 너무 많이 보였다. 억지 논리는 초등학생들 눈에까지 어설프게 보였으며, 금과옥조로 내세운 도덕성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겉으로는 젊은이들에게 실망을 줘 송구스럽다고 머쓱한 표정 짓고 있으나, 책임지겠다고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다. 제대로 된 화끈한 사과를 기대한 국민들에게 변명으로 일관된 ‘사과 기자회견(?)’은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거대 야당 또한 국민들에게 믿음 주기에는 너무 거리가 너무 멀다. 집권 세력에 대한 실망으로 일시적으로 움직인 지지도에 샴페인 터뜨리는 모습은 조금도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있다. 요란하게 벌인 ‘새 피 수혈’ 시도는 그저 그렇고 그런 성과만을 냈을 뿐이다.
미리 예측하자면 총선을 앞두고 여야당 모두 정당 바깥의 인물을 영입하여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밀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성공 사례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비대위 구성만으로 위기를 모면하려고 한다면 국민들에게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할뿐더러, 무지렁이 국민을 한 번 더 속이는 일이 될 것이다.
보수진영이든 진보진영이든 그 구성원들은 거의 같은 인성(人性)을 지녔다고 할 것이다. 진보적 인사라고 해서 더 도덕적이라고 할 수 없다. 거꾸로 얘기하자면 진보진영의 특정 인사가 비도덕적 행태를 보였다고 해서, 괘씸하기는 하지만, 보통사람보다 더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 물론 ‘속았다’는 허전함은 남을 것이다. 그러나 보다 나은 ‘좋은 사회(good society)’를 만들기 위해서는, 겉으로라도 정의를 부르짖는 사람이 많을수록 좋을 것이다. 비록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일치하지 않는, 겉 다르고 속 다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소위 말하는 ‘촛불 정신(?)’을 살리고 거기서 교훈을 얻자면, 후손들에게 보다 나은 좋은 사회를 물려주기 위해서는 정치체제의 근본적 변혁을 가져와야 한다. 정치체제의 개편을 통해 희망 주는 정당들이 나타나야 우리 사회의 앞으로의 백년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당장의 총선에서 이겨 정권을 창출 또는 재창출하겠다는, 좁은 시야를 가진 정당은 생명이 길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사회 발전에 조금도 기여하지 못할 것이다. 현존하는 거대 여당과 거대 야당이 해체되어 재구조화되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혼란스러운 현재의 정국이 기회일 수 있다.
국민 의사를 조작(造作)하는데 골몰하는, 정치 공학에 능한 정당들로는 국민들에게 결코 희망을 주지 못할 것이다. 유럽 사회에서와 같이 국민들의 의사를 보다 가깝게 반영하는 다정당 체제가 갖춰지면 더욱 좋을 것이다. 이러한 이상은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루어지기 힘들 것이다. 그렇지만 유권자들이 만들어 가는 민주 사회에서는 국민들이 간절히 원한다면 정치 개혁은 반드시 이루어질 수 있고 현실화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