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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4-07-12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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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발언대] 풀들의 전쟁ㅡ잔디의 반격 * 정달호 회원이 자유칼럼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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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들의 전쟁ㅡ잔디의 반격  * 정달호 회원이 자유칼럼에 기고한 글입니다.

2024.07.10

정원을 가꾸어 온 지 십여 년이 넘는데도 여전히 초보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간 나무들이 많이 커서 숲을 이룰 정도인데 할 일은 점점 늘어나고 그 와중에 생각지 않던 일들도 일어나지요. 노루 같은 야생동물의 행패(?)도 아닌데 까닭없이 죽는 나무가 있어 의아해하면서도 속수무책일 수밖에는요. 그게 굼벵이 때문인지를 안 지도 몇 년밖에 안 되는군요.

땅 위 벌레 못지않게 땅속 벌레들도 만만치 않아요. 특히나 큰 굼벵이들이 나무의 잔뿌리를 갉아먹어 나무가 점점 말라죽는 일이 적지 않지요. 땅속 벌레를 없애는 전문 농약을 뿌려도 뿌리에까지 닿지 못해 굼벵이는 여전히 기승을 부리는군요. 그들은 떼를 지어 옆으로 이동하면서 새로운 나무들을 공략합니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지만 정작 굼벵이가 제법 큰 나무를 사멸(死滅)시키기도 하니 세상에 만만한 미물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보다 더 큰 골칫거리는 아래 큰 잔디밭으로서, 관리가 미흡하여 잔디 마당이 통째로 엉망이 된 것입니다. 야외콘서트를 해도 될 만한 넉넉하고 싱그러운 잔디밭이었는데 연전에 예초기를 무리하게 휘두르다가 잔디가 뿌리까지 대폭 상해버린 것이죠. 게다가 그무렵 가뭄까지 겹쳐서 잔디밭이 황폐화되기에 이르렀답니다. 잔디가 소생할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여 유채밭이나 메밀밭으로 전환하기로 하고 포클레인으로 땅을 갈아엎어 씨를 뿌렸습니다. 싹이 돋고 꽃이 피고는 했지만 딱히 농사로 생각하고 벌인 일이 아닌 데다 산지(山地)라 노루의 내습(來襲)도 잦아 밭이라고도 하기 어려운 모양새가 되고 말았죠.

멋진 잔디밭을 자랑하던 이 땅이 어느 순간 잡초밭으로 변해버렸으니 이런 난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보기 좋으라고 가꾸어온 정원이 온통 어수선하게만 되었으니 말이죠. 주변의 나무들은 무성해져서 제법 숲 같은 기분이 나지만 그 아래 잔디밭을 오가면서는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 없었죠. 이따금 제초제를 줘봤자 일시적일 뿐 잡초는 태생적인 생명력을 발휘해 막무가내로 세(勢)를 불립니다.

아무튼 이 상황에서 잡초밭을 다시 잔디밭으로 만드는 것이 대안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새로 잔디를 심는 것도 큰일일 테고 다시 멋진 잔디밭이 되었다 하더라도 체력이 전 같지 않아서 잔디를 깎는 게 예삿일이 아닐 터라서요. 이래저래 고심 중에 어느 날 아내가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잡초밭을 이대로 두고 집 안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곶자왈' 돌들(자연스럽게 생긴 돌로 석화가 피거나 이끼가 끼어서 보기에 좋음)을 잘 배치해서 그 주변으로 군데군데 화초를 심으면 곶자왈 숲에 온 것처럼 보기 좋고 나름 특별한 정원이 될 수도 있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이에 즉각 찬성을 하여 둘이서 곧 실행에 옮겼습니다. 수레로 머리통보다 훨씬 큰 돌을 대여섯 개씩 담아 일이십 미터 거리에 열댓 번을 날랐습니다. 어떤 돌들은 둘이서 마주 들고서도 낑낑대야 했답니다. 될수록 자연스럽게 보이게끔 나름 멋을 부려 배치했습니다. 큰 돌, 작은 돌, 잘생긴 돌, 못생긴 돌을 잘 골라 모아서 여러 모양으로 놓고는 다시 둘러보고 바꿔놓기도 합니다. 며칠이 걸려 일단 완성을 보았지만 매일 지나다니며 고쳐보기도 하면서 작은 만족감을 갖게 되죠. 돌을 재료로 하는 '설치 작품(installation work)'이라고도 생각한답니다.

꽃도 곶자왈 돌과 어울리도록 되도록이면 들꽃 중심으로 씨를 뿌리거나 삽목을 하거나, 집 정원의 다른 곳에서 옮겨 오거나 해서 정성스레 심습니다. 돌정원이 점점 모양을 갖춰가는 걸 보면서 흐뭇해합니다. 지나다니면서 스트레스를 받게 하던 잡초밭이 멋진 '곶자왈 정원'이 돼가고 있으니까요. 와서 보는 사람들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저그런 잔디밭보다는 깊은 숲에 가서야만 볼 수 있는 멋진 야생의 꽃밭 보는 걸 더 좋아할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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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성 중인 곶자왈 정원 / 2. 좌동 / 3. 쿠라피아의 기세 / 4. 잡초와 쿠라피아 . . .
5. 돌계단 사이사이에 심은 백리향

스트레스를 주는 문제가 또 있었습니다. '떼'라고 불리는 풀이 있는데 땅속 20센티까지 뿌리가 뻗어서 서로 얽히고설키는 잡초로서 하얀 꽃이 피면 꽃씨가 사방으로 퍼집니다. 꽃이 피는 족족 잘라서 퍼지는 걸 방지해왔는데 한두 해 소홀히 하는 통에 여기저기 아예 떼 밭이 된 곳이 많아졌습니다. 억새와 비슷한 모양인데 키가 훨씬 작죠. 산에 군락을 이루어 하얀 꽃을 피우면 가을 억새처럼 멋지지만 집 정원에 퍼지면 아주 골치 아픈 존재랍니다.

억새는 더 무성하고 더 거칠어도 뿌리가 이처럼 별나지는 않아서 삽으로 파내면 일단 끝장을 낼 수 있는데 떼는 뿌리가 깊게 얽혀 있어서 파내기가 여간 일이 아니에요. 떼 군락을 찾아내서 일일이 삽과 괭이로 파내고 강력한 제초제도 뿌려서 일단 제압을 하긴 했는데 장마 지난 후 곧 다시 살아날 것 같은 낌새가 보여 우려스럽기도 합니다. 연전에 토끼풀과 쑥 따위와 씨름을 했는데 이제는 떼풀과 전쟁을 벌이는 형국입니다.

정원 어느 구석이든 초록의 땅바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히 풀들의 전쟁입니다. 잡초가 잔디를 이기면 스트레스를 받고 반대로 잔디가 잡초를 이기면 미소가 번지지요. 망가졌던 아래 잔디밭 말고, 위 잔디밭에 부분제초제를 주었더니 잔디는 그대로 있고 잡초만 죽거나 약해졌습니다. 이 틈에 잡초 사이를 뚫고 곳곳에 잔디가 솟아나는 걸 보는 흐뭇함이 적지 않답니다. 그전에 땅벌레 약을 뿌린 덕에 잔디의 뿌리가 튼튼해져서 더 힘을 받은 것 같기도 합니다. 아무튼 잔디의 반격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군요.

또 하나의 희망은 근년에 구해서 심은 '쿠라피아(curapia)'입니다. 얼핏 모습은 타임/백리향(thyme)인데 연약해 보이지만 잔디보다 더 강인합니다. 제초제를 곁다리로 맞고서도 한동안 지나고 나면 다시 일어나는 끈질긴 풀꽃입니다. 일본에서는 잔디 대용으로 심기도 한다는데 바닥을 기면서 사방으로 퍼져나가죠. 매일 아침 나가서 보면 잡초와 서로 다투면서 세를 키우더라고요. 메밀꽃처럼 작은 꽃인데도 벌들이 붙어서 바쁘게 움직입니다. 이 앙증맞은 작은 것들은 밟아도 죽지 않습니다.

정원 가꾸는 재미가 이런 건가 하면서 한여름의 일상을 보내고 있습니다. 바닷가 보목리에 사는 지인이 이걸 보고 자기도 곶자왈 정원을 만들어보고 싶다고 하는군요. 잡초 스트레스도 떨쳐내고 이웃에 아이디어 전파도 하니 즐겁습니다. 가까이에 혼자 사는 60대의 아주머니는 2백 평가량의 땅에 집을 지어 살면서 앞뜰에 작은 정원과 뒤뜰에 텃밭을 가꾸고 있는데 너무 잘 가꾸어 놓아서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동화 속 집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이분은 늘 행복해 보이며 이웃들에게도 잘합니다. 정원 가꾸기가 주는 효과가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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