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 맛집, 그리고 미식에 대하여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 1932~2016)는 어느 책에서, 맛있고 귀한 음식을 먹으러 2백 킬로미터 거리를 기꺼이 달려가겠다고 하는 어떤 열정적인 미식가(美食家) 친구에 대해 얘기합니다. 에코는 본인도 미식을 즐기는 사람이지만 그 친구처럼 극렬하지는 않다고 하면서 자기는 미식을 위해 2백 킬로미터를 달려가기보다는 맛있는 동네 피자집엘 가겠다고 했습니다. 저도 움베르토 에코처럼 '합리적 미식가'에 한 표를 보태고자 합니다. 또 다른 미식가로서 연전에 세상을 떠난 명배우 숀 코너리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프랑스 요리사 둘을 늘 곁에 둔 것으로 전해지고 있죠.
저도 비교적 미식을 찾는 부류이긴 한데, 세상에는 미식가가 아니라는 말을 들으면 속상해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반면에 음식에 대해 까다롭게 굴지 않으면서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사람도 꽤 있습니다. 어렵게 살 때는 미식이란 말을 들으면 괜한 거부 반응이 일기도 했지만 대부분이 요족(饒足)한 삶을 누리는 요즘엔 한 끼를 맛있게 먹으면 그만큼 일상의 행복이 더 커진다고들 믿는 것 같습니다.
미식가들은 집에서 음식을 해 먹을 때도 맛에 신경을 쓰겠지만 외식을 할 때는 더더욱 맛집을 골라서 가려고 할 것입니다. 미식가들은 맛집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한 노력도 꾸준히 해야겠지요. 저의 경우는 티브이 채널을 돌리다가 먹는 얘기가 나오면 귀가 솔깃해집니다. 티브이의 먹는 프로그램은 대략 두 종류로서 하나는 요리를 하거나 먹는 장면을 담는 프로그램이며 다른 하나는 유명 맛집이나 각 지방의 대표 음식을 찾아다니는 음식 순례 프로그램입니다.
먹방, 즉 먹는 방송 중 요리 강습은 흥미롭기도 하지만 지루한 경우가 적지 않고 또 일정한 레시피에 따라 만드는 음식은 그리 식욕을 돋우지도 않습니다. 이에 비해 맛집들이 내는 음식은 주인/주방장이 재료와 조리법의 시행착오를 거쳐 다년간 개발·개선한 것이므로 조리 과정 자체가 흥미를 자아낼 뿐 아니라 맛이 뛰어나서 과연 미식이라 할 만합니다. 비슷한 재료를 가지고서도 각기 차별성 있는 독특한 맛을 내는 것을 보노라면 경이롭기도 합니다.
먹는 프로그램 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허영만의 '백반기행'입니다. 이처럼 롱런(long-run)하는 유사한 프로그램들도 있지만 백반기행은 순수히 맛, 즉 미식을 추구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식재료의 구입·처리·보관에서부터 숙성 방법과 조리 과정 등을 잘 보여주므로 화면만 보고 있어도 그 맛을 느낄 수 있을 정도입니다. 호스트(Host)인 허영만 씨가 상대 식객(주로 인기 연예인)과 나누는 촌철의 입담도 진국이고, 식객들이 밥상 너머로 주고받는 구수하고 진기한 이야기도 이 프로그램의 매력 포인트입니다.
시야를 넓혀서, 미식이라 하면 대부분 프랑스를 먼저 떠올리게 됩니다. 미식의 나라답게 프랑스에서는 미셸린가이드가 1900년대부터 국내 맛집들을 소개해왔는데 근래에는 세계적으로 널리 확산되었습니다. 미셸린가이드는 미셸린 타이어 회사가 타이어 홍보의 일환으로 각 지방의 호텔이나 식당, 기타 편의 시설을 소개하는 안내서로 만들기 시작하여 점차 맛집 가이드로 발전한 것입니다. 평가는 별 하나에서 별 셋까지 주는 건데 요즘에는 진짜 별은 아니라도 그 정도로 맛있는 식당들에 '뜨는 별(Rising Star') 마크를 별도로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외에도 미셸린 사이트를 통해 환경 기여도를 인정하는 녹색 별(Green Star)을 주며, 또 그냥 먹을 만한 괜찮은 식당에는 '플레이트(Plate)' 마크를, 저렴하고 가성비 좋은 식당에는 '빕 미식가(Bib Gourmand)' 마크를 부여합니다. '빕'은 미셸린 로고인 비벤둠(Bibendum, Michelin Man)의 줄임말이고요.
우리나라에도 미셸린가이드가 도입돼 있지만 정식 빨강 가이드에 오른 식당들은 가격이 너무 비싸서 저로서는 가볼 엄두를 못 내겠습니다. 한편 많은 외국인 셰프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김치 된장 등 우리 음식을 기반으로 갖가지 미식을 발전시키고 있는데 우리 음식이 그만큼 국제적으로도 인기가 높아가고 있음을 증명하는 유력한 사례라 하겠습니다. 거꾸로 세계 주요 도시에서 한식 또는 퓨전 한식이 점점 더 인기를 끌고 있다는 뉴스도 우리를 미소짓게 합니다. 유럽 셰프들에게 요즘의 화두는 발효(發酵)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문화현상의 일반적 세계화와 더불어 음식의 세계화도 점차 심화되고 있습니다. 크게 세계화된 음식으로 중국식, 프랑스식, 이태리식, 태국식, 인도식을 들 수 있고 그외에도 한식, 일식, 멕시코식, 베트남식 등을 들 수 있겠습니다. 이태리식은 중국식과 나란히 세계 어딜 가나 만날 수 있지만 주로 피자나 파스타만 그렇고 이태리식 코스 메뉴는 파스타만큼 인기가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프랑스와 이태리 요리 비교는 2022년 6월 9일 자 칼럼 '생선요리 좋아하세요? 1' 참조) 한때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았던 일본의 스시(Sushi, 생선초밥)는 일본 국력이 상승할 때 가장 인기를 누렸던 것 같습니다. 제가 오스트리아에 근무하던 1990년대 말 비엔나에는 일식집이 갑자기 많이 생겼는데 ''여자친구에게 스시를 사줄 줄 모르면 남자 자격이 없다''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저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중국 요리와 프랑스 요리가 세계 미식의 양대 주류를 이루지 않을까 싶습니다. 중국은 땅덩어리가 큰 만큼 지역별로 다양한 미식을 자랑합니다. 광동식, 사천식, 북경식, 양주(揚州)식, 정주(鄭州)식 등등 지역별로 고유한 스타일이 있으며 중국 어느 지역의 요리를 선호하는가는 각자의 취향이 결정하겠지요. 저는 중국에 살아보지 않아서 중국 요리 미식 경험이 일천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양념이 강하지 않고 해산물을 위주로 하는 광동식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한편, 저는 프랑스에서 3년을 살면서 자주 프랑스 요리를 접하다보니 프랑스식을 꽤나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짧은 기간이어서 결코 잘 안다고 할 수준은 못 되지만 여행을 하면서 여러 지방의 다양한 요리 스타일에도 관심을 가져보았습니다. 한마디로, 프랑스는 음식이 매우 다기다양(多岐多樣)한데 무엇보다 그 나라의 지리적 특성이 이를 잘 뒷받침해줍니다. 프랑스인들은 가끔 자국을 헥사곤(Hexagone. 6각형)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하죠.
우리나라처럼 3면 바다(지중해, 대서양, 북해)를 낀 프랑스는 별명대로 6각형의 지형으로서, 육지 부분은 알프스에 연한 산악 지대와 여타 광대한 평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바다와 땅을 고루 갖춘 지리적 이점을 누리는 이 나라는 식재료가 풍부하고 다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더해 지역별 우수 포도 산지에서 나는 고급 와인까지 다양하게 빚어지고 있으니 '미식의 나라'가 되지 않을 수 없겠죠. 미식은
프랑스의 식당의 주방 모습
미주(美酒)와 함께할 때 더 빛이 나게 마련입니다. 보르도, 부르고뉴 등 주요 와인 산지에 연(沿)한 도시에서 미식이 더 발달한 이유이기도 하죠.
개인적인 에피소드지만, 프랑스 근무 시 아내가 꼬르동 블뢰(Cordon Bleu)라는 요리 강습소에 요리를 배우러 갔다가 돈 낸 만큼 딱 열 강좌만 나가고 포기하였습니다. 프랑스 요리의 핵심인 소스를 만드는 작업이 어떤 것은 하루가 꼬박 소요될 정도로 꼼꼼해서 따라가기가 힘들다는 게 이유였는데 제가 여태 아쉬워하는 대목입니다. 그때 더 열심히 배워두었더라면 지금 집에서도 제법 프랑스 요리를 즐길 수 있었을 텐데 하는 마음이랍니다.
미식을 얘기하면서 주로 고급진 음식 위주로 이야기한 측면이 있지만 고급이 아닌 싸고 맛있는 서민적인 음식도 미식에서 뺄 수 없습니다. 냉면 칼국수 등 면(麵)류, 생선이나 육류로 만드는 탕(湯)류, 갑각류로 담근 장(漿)류, 즉석구이류, 각종 졸임이나 찜 등에서도 입에 착 달라붙는 맛의 진수를 만날 수 있습니다. 미식이란 결국 다양한 재료를 잘 써서 최상의 맛을 내는 그런 음식을 말하지 않나 싶군요. 움베르토 에코처럼 우선 주변에서 일상의 미식을 찾아나서는 게 바람직한 미식의 시작일 것입니다. 미식을 찾아가는 여러분께 '본 아뻬띠(Bon appétit !)' 맛있게 드시라는 인사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