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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5-02-01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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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발언대] 국립근대미술관이 있어야 * 정달호 회원이 2025.02.01자로 '자유칼럼'에 게재한 글입니다.

본문

국립근대미술관이 있어야

 

연전 이건희 회장이 작고한 후 유족이 미술품 기증을 발표했을 때 저는 좀 아쉽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본인 생전에 그 많은 소장품을 전시할 근사한 미술관을 지어서 남겼더라면 어땠을까 하면서 말이죠. 유족의 발표가 있고 나서 국가가 그의 기증품을 전시하기 위한 별도의 미술관을 짓는다는 얘기가 나오자 더욱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엄청난 규모의 소장품을 기증하는 것 자체는 대단히 환영할 일이지만 왜 국가나 지자체가 나서서 개인 소장품 전시를 위해 거대한 건축물을 세워야 하는지에 대한 회의가 일었던 것입니다.

 

유족은 이 회장이 남긴 컬렉션을 분산 기증하였는데 소장 명작들 중 일부를 특성에 맞게 지방 미술관으로 기증하기도 했습니다. 한 예로, 이중섭 작품 12점을 서귀포 소재 이중섭미술관에 보내는 식이죠. 기증품 23천 점의 대부분은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분관에 기증되었는데 정부 당국은 기증된 미술품으로 별도의 이건희 기증관을 짓는다는 생각이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기증관 건립이 추진되고 있는 중에 미술계 일각에서 기증품을 받은 그대로 전시하면 예술사적 특징이 없어진다는 문제점을 지적해왔습니다.

 

이런 문제점을 인식하고, 기증 작품 중 근대미술 작품들을 골라 다른 장소에 있는 근대미술 작품과 합쳐서 새로이 '국립근대미술관'을 짓는다는 방향으로 논의가 새롭게 진행되고 있다 해서, 미술애호가로서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간 몇 차례 있었던 관련 세미나에 이어 작년 723일에 열렸던 세미나에는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도 나와서 그 필요성을 인식한다고 말했다 하니 이미 확보된 송현동 부지에 국립근대미술관이 들어설 개연성이 작지 않아 보입니다.

 

현재, 근대미술 작품까지 포괄하는 '국립현대미술관'은 과천관, 덕수궁관, 서울관(Museum of Modern & Contemporary Art, MMcA)이 있지만 현대미술과 구별되는 근대미술 작품만을 전시·소장하는 미술관은 없기 때문에 국립으로 근대미술관을 따로 짓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서울관은 현대미술 작품들만 전시하도록 하고 여기서 멀지 않은 위치에 국립근대미술관이 자리한다면 미술애호가들은 물론 국내외 관광객들이 찾아가기에 매우 편리할 것으로 보입니다.

 

예술사적으로도 고대·중세와 현대를 잇는 근대의 미술품을 따로 모아 전시하는 것은 작지 않은 의의가 있을 것입니다. 프랑스 파리에도 고대·중세 미술품이 있는 루브르박물관, 근대 미술품이 있는 오르세 미술관, 그리고 현대미술 중심의 퐁피두센터가 있어 시대 구분에 따라 미술 작품을 감상하기 좋게 돼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낱 애호가일 뿐인 제가 이런 문제에 이러니저러니 하는 것이 오지랖 넓고 외람되기도 하지만 최근에 '살롱 드 경성'이라는 책(부제: 한국 근대사를 수놓은 천재 화가들)을 읽고 나서 이런 생각을 더욱 굳히게 되었습니다. '살롱 드 경성'은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인 김인혜 박사가 20223월부터 2년 남짓 조선일보에 연재해오던 '김인혜의 살롱 드 경성' 글들을 모은 것입니다. 당시 연재 글도 흥미롭게 읽었지만 이번에 천연색 도판이 그득한 단행본에 실린 기라성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보면서 우리나라에 이런 선구적인 예술가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우리는 근대 서양화, 하면 모네, 르누아르, 고흐, 고갱, 세잔, 마티스, 피카소 등을 떠올리고 근대 조각, 하면 로댕, 자코메티, 부르델(Antoine Bourdelle), 클로델(Camille Claudel) 등을 떠올리기 십상입니다. 여기에 더해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까지 댈 수 있으면 상당한 미술애호가이거나 잠재적인 애호가로 볼 수 있습니다. '살롱 드 경성'은 우리나라의 서양화 선구자 40여 명의 삶과 예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근자에 읽은 어떤 소설보다도 더 흥미진진합니다. 하나하나 이야기 속에 우리의 근대사가 들어 있어 그 조각조각을 엮어도 마치 하나의 역사소설을 읽는다는 느낌을 줄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이중섭과 박수근 외에도 일제 치하 신산(辛酸)한 삶과 전쟁의 참화 등 온갖 역경 속에서 꺼지지 않는 예술혼을 불태우며 불후의 명작을 남긴 예술가들이 많습니다. 한 분 한 분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그들이 남긴 삶의 자취가 가슴을 때립니다. 특히 제게 깊이 와닿은 인물로, 이쾌대, 이인성, 임군홍, 변월룡, 오지호(이상 화가), 권진규, 문신(이상 조각가), 그리고 여성으로는 최초 여성 화가 나혜석과 김기창의 아내 박래현을 들겠습니다. 이 자리에서 일일이 다 언급할 수 없는 일이지만, 문외한인 저도 이들의 작품을 직접 보기 위해 조만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을 찾을 생각입니다.

 

이런 보석 같은 이야기들을 엮어놓은 '살롱 드 경성'은 애호가들이 우리 근대미술사와 친해지는 데에 필수적인 자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자인 김인혜 박사를 알게 된 것은 2016년 그가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사로 있을 때 기획한 '이중섭 백년의 신화전'(덕수궁관)을 통해서였습니다. 전시를 두 번이나 보면서 그 기획력에 감탄하였고 도록을 통해 이중섭을 소개한 글에서도 명실공히 우리 근대미술 전문가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유칼럼 2016. 7.23 '이중섭 백년의 신화전을 보고' 참조)

 

우리 미술사에서 이렇게 큰 족적을 남긴 근대미술가들을 기리고 그들의 작품에 담긴 예술 세계를 경험하는 것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커다란 기회이자 축복이라 생각됩니다. 나날이 세계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K--문화 음악 분야 못지않게 미술 분야의 인적·물적 자산에도 상응하는 자리를 찾아주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오늘날의 미술애호가들뿐만 아니라 미래 세대들을 위해서도 현대미술(Contemporary Art)과 구분되는 근대미술(Modern Art) 작품들을 따로, 온전히 전시하여 애호가나 전문가들이 작품을 감상하고 작가를 연구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대부분 일제 시대 초기에 태어나 일제강점기라는 뼈아픈 현실과 6.25 전쟁 후의 빈곤과 혼란의 시대를 살아낸 분들이 빚어낸 70, 80년간의 작품들이 우리 근대미술입니다. 앞서 지적한 대로 '이건희미술관'을 지어 평생 모아 온 소중한 미술품을 기증한 그분의 업적을 부각하기보다는 그의 컬렉션 중 근대미술 작품들만을 떼내어서 기존의 근대미술 작품들과 한데모아 전시·소장토록 하는 게 바람직한 방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이재용 회장은 선친이 수십 년간 모은 미술품 약 23000점을 2021년 국가에 기증하면서 가문의 뜻을 이어오고 있다. 그는 기증 당시 우리 문화재와 미술품에 대한 사랑의 뜻을 국민과 함께 나눠야 한다는 선친의 뜻을 기려서 조건 없이 사회에 환원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이로써 국보 총 14, 보물 총 46점 등의 고미술품 21693점과 이상범의 무릉도원도’(1922), 박수근의 절구질하는 여인’(1954), 이중섭의 황소’(1950년대), 클로드 모네의 수련이 있는 연못’(1919~20), 살바도르 달리의 켄타우로스 가족’(1940), 호안 미로의 구성’(1953) 등 국내·외 근현대미술품 1494점이 국가에 귀속됐다.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83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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