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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4-03-24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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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발언대] 실크와 실크로드 *정달호 회원이 자유칼럼(2024.03.18자)에 기고한 글입니다.

본문

 

실크와 실크로드

 

실크로드(Silk Road)는 실크 무역을 위해 생겨난 육상 또는 해상의 무역루트입니다. 동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이 무역로는 기원후 2세기경에 북으로 확장하던 한(漢)나라가 바깥 나라들과 무역을 시작하면서 점차 서쪽으로 뻗어 유럽까지 이어진 길인데 실크로드 또는 '실크루트'라는 말 자체는 19세기에 쓰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고대 중국과 외부 세계의 무역에서 실크가 차지해온 비중이 얼마나 컸던가를 알 수 있습니다.

실크는 오래전부터 유럽, 중동, 페르시아를 비롯한 중국 바깥 세계에 인기가 큰 품목이었습니다. 기원전 수천 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실크 생산은 오랫동안 중국의 독점 산업이었지만 점차 밖으로 퍼져나갑니다. 고대부터 중국인들과 교류가 많았던 한국, 일본 등으로 먼저 퍼져나가고 그다음 인도, 이집트, 시리아,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포르투갈, 영국 등지로 확산됩니다.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잠업(蠶業, sericulture)이 고조선 때 중국에서 건너온 이민자들에 의해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많다고 합니다. 일본에는 우리나라를 거쳐 전해졌을 수도 있고 중국과의 직접 교류를 통해 전해졌을 수도 있습니다. 잠업에 관한 사항은 대외적으로 중국의 국가 기밀이었으며 누구라도 누에를 비롯한 실크 생산요소를 밀반출하다가 걸리면 죽음을 각오해야 할 정도로 통제가 엄했습니다.

이처럼 바깥으로의 반출이 어려운 상황에서 6세기 한 동로마 황제는 네스토리우스교(Nestorian, 景敎) 선교사에게 밀명을 내려 비밀리에 누에를 반출해올 것을 지시합니다. 중국에서 임기를 마친 네스토리우스교 선교사 2명이 지팡이 속에 누에를 숨겨 반출에 성공함으로써 누에치기, 실뽑기 등 잠업이 로마에 도입되었다고 합니다. 고려 때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목화 씨앗을 붓대롱에 숨겨서 가지고 나온 것과 흡사합니다.

한편 실크로드를 통해 그리스를 거쳐 로마에 수입된 실크는 로마인들에게는 사치와 풍속 문제 등으로 논쟁거리가 되기도 했습니다. 실크는 그 무게만큼의 금과 값이 같을 정도로 비싼 사치품이었는데 일부 식자들은 부유층이 실크옷을 입는 것을 조롱하였다고 합니다. 실크옷은 훤히 드러나서  몸도 보호하지 못하고 염치도 보호하지 못한다는 게 그 이유였습니다. 그럼에도 실크는 점점 더 유행하게 되었는데 기원후 1세기경으로 추정되는 폼페이 유적 중 한 벽화에는 실크옷을 입은 여인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보다 훨씬 이전으로 추정되는 출토 도자기에도 실크옷과 직조기 등이 등장한다고 하죠.

당시 실크로드를 통해 들어온 중국 실크는 신비롭게 보이기까지 해서 로마에서는 바람의 직물(woven wind)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어떤 박식자는 실크는 신비한 나뭇잎에서 자라는 모직(wool) 성분으로 그 잎을 물속에 넣어 빗으로 쓸어내어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했답니다. 당시 사람들은 중국을 실크의 나라로 부를 정도로 중국 실크를 좋아하였던 것 같습니다.

실크의 유래에 대한 재미있는 신화는 원조국(元祖國)인 중국에도 있었죠. 고대 중국의 어떤 황제의 비(妃)가 차를 마시는데 갑자기 누에고치가 찻잔 속으로 떨어졌습니다. 신기해서 꼬챙이로 고치를 찔러보았더니 뜨거운 찻물에 눅눅해진 고치가 풀리면서 실 가닥이 잡혀 실을 뽑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중국이 누에를 쳐서 실을 뽑고, 뽑은 실로 옷감을 짜는 잠업을 시작했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 황제의 비를 누에의 여신으로 불렀다 합니다.

실크는 여러 색깔로 변하는 성질이 있는데 그것은 고치에서 뽑아낸 실이 프리즘처럼 삼각형이어서 빛의 방향에 따라 색깔이 변하기 때문이죠. 누에고치 하나에서 대략 1마일 정도의 실이 나오는데 누에고치를 제때에 가공하지 않고 그냥 두면 나방이 고치를 뚫고 나오기 때문에 실이 중간중간 끊어져서 못쓰게 됩니다. 시기를 잘 봐서 그 이전에 고치를 뜨거운 물에 넣어 번데기도 죽이고 실을 온전히 보전하는 게 중요합니다.

다른 직물들과 달리 번쩍거리는 실크는 매우 가벼우면서도 고유한 색감 때문에 특별한 지위를 누려온 것 같습니다. 중국에서도 1천 년 이상 실크 옷은 황실 사람들과 고관대작들만 입을 정도로 귀한 물건이었으며 비단의 길이로 가치를 매겨 금화, 은화 등 코인을 대신하는 화폐로 통용되기도 하였습니다. 오늘날에는 각종 섬유가 고급화되어 실크의 가치가 전과 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 실크 제품은 약하고 세탁이 쉽지 않은 문제가 있죠.

실크가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것은 여성의 의상이나 스카프, 넥타이 등일 것입니다. 실크라는 직물이 없었다면 여성들이 그렇게 멋진 의상으로 뭇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못했을 것입니다. 상류사회의 남성이 쓰던 실크 해트(silk hat)는 통상  톱해트(top hat)로 불렸는데 멋지게 보이기 위해 위로 높이 솟은 모자는 가벼운 실크로 만든 게 아니면 그처럼 유용성이 없었을 것입니다.

오래된 통계이긴 하나 세계적으로 실크 생산의 74%를 원조국인 중국이 차지하고 있으며 또한 중국은 실크 수출시장의 90%를 담당해왔습니다. 대체로, 온화한 서부 지역은 실크 실을 생산하고 동부 지역은 주로 가공을 담당해 왔다고 합니다. 아제르바이잔도 고대로부터 실크산업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질이 좋은 실크는 스위스, 이탈리아, 일본 등으로 수출하였다죠. 영국의 체셔(Cheshire)도 17세기 이래 실크 직조가 산업의 주요 부분이었으며 당시에는 각 가정의 다락방에 직조기를 두고 작업을 해왔다고 합니다.

실크 산업의 바탕인 잠업은 대부분 공장보다는 가정에서 해 온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어릴 때만 해도 큰집에 가면 누에를 치는 방이 있어 누에섶에 뽕잎을 썰어서 올려주고 이따금 물도 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할머니가 물레를 돌려 명주실을 잣는 것도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견직산업은 1950, 60년대를 지나면서 사양 산업이 되었지만 한창때는 견직(絹織)산업으로 큰 부를 축적하기도 했습니다.

옷이나 스카프 등과 관련이 없이 실크라는 말을 비유적으로 쓰기도 합니다. 오래전 아이슬랜드의 온천에 갔을 때 유황 성분이 강한 물로 목욕을 하다가 마치 몸에 실크가 감기는 듯한 부드러운 감촉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 어쩌다 고급 와인을 마실 때면 목넘김이 비단결 같다고 말하곤 합니다. 매우 곱고 듣기 좋은 목소리를 비단결 같은 목소리라고도 하죠. 마찬가지로 베를린 필, 빈 필 같은 최고의 오케스트라가 내는 소리를 비단결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실크는 우리 삶에서 한없이 부드럽고, 고급지며 사치스러운 것을 대변해온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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