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펜젤러 목사를 기리며
* 이 글은 청류회의 정달호 회원이 2019년 02월 19일자 자유칼럼에 기고한 글입니다
지난해는 아펜젤러 목사(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1902) 탄생 160주년을 맞은 해였습니다. 이에 맞춰 쓰려던 글이었지만 이러쿵저러쿵 미루다보니 해를 넘기게 되었습니다. 아펜젤러는 학창시절 근현대사 시간에 나왔던 인물이지만 학창을 떠나서는 특별한 연고가 있는 이들 외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거의 잊혀진 이름이 아닐까 싶습니다. 설립자인 아펜젤러 목사의 탄생 160주년 기념사업이 펼쳐지는 구 배재학당 일대에 가보면 완연히 다릅니다. 정동(貞洞)의 현 배재대학교 부근에는 아펜젤러 목사를 새로이 기리고자 하는 모습이 크게 눈에 띕니다. 정동이란 장소가 대중교통에 별로 노출되지 않은 조용한 곳이라 사람들이 잘 인식하지 못하지만 이 동네를 자주 드나드는 저 같은 사람은 때마다 아펜젤러 목사가 남긴 족적(足跡)에서 역사의 무게를 느낍니다.
우선 구 배재중고교 건물로 쓰이던 현 배재박물관 정원에는 최근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 아펜젤러 목사의 금빛 조상(彫像)이 크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강단에 서서 책을 펴보는 모습으로, 앞에 서면 그의 인간(persona)과 그가 남긴 업적에 감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배재대학교 건물 뒤편 순화동 쪽에는 그의 이름을 딴 공원이 새로 조성되었으며, 한 면에 ‘신문화의 요람’ 다른 한 면에는 ‘신교육의 발상지’라고 새겨진 커다란 표지석이 오래전부터 중앙에 우뚝 서 있습니다. 작년 한 해 동안에는 아펜젤러의 초상을 그린 대형 현수막도 걸어놓았는데 아래쪽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러 왔다.”란 그의 말이 씌어 있었습니다. 큰 울림을 주는 글귀로, 다니다가 이 글귀를 보면서 더욱 옷깃을 여미곤 했습니다.
일 때문에 정동을 자주 내왕하면서 배재학당이 우리 신교육에서 차지한 역할에 깊은 인상을 받아 오던 차에 이번 아펜젤러 목사 탄생 160주년을 기리는 현장을 목격하고는 이분에 관해 올바로 파악하여 국민들에게 잘 알릴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근래 들어 정치, 사회, 교육, 사법 등 어느 분야에서나 국민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 너무나 희소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나마 존경받던 인물들도 이런저런 프레임에 갇혀 나락(奈落)으로 떨어지고 있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아펜젤러는 1884년 미국 감리교(Methodist Church) 선교위원회에서 조선 선교사로 임명되어 다음해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하여 조선에 도착합니다. 그해 7월(고종 22년), 아펜젤러는 한 달 먼저 도착한 스크랜턴 선교사/의사(William Benton Scranton, 1856~1922)의 집 한 채를 빌려 교실을 꾸며 학생 둘만으로 학당을 시작합니다. 고종은 이듬해 배양영재(培養英材)의 줄임말인 배재(培材)를 넣어 ‘배재학당’이란 교명과 편액을 하사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배재중고교, 배재대학교의 전신임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학교설립의 목적을, 통역관이나 교사를 양성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교육받은 사람을 배출하는 것으로 밝혔다고 하니 고종의 뜻을 받들어, 뒤떨어진 당시 우리 사회를 이끌어갈 엘리트를 양성하려는 취지였을 것입니다.
그는 나아가 큰 인물이 되려는 사람은 남에게 봉사할 줄 알아야 한다는 기독교적 가르침을 실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아들 다지 아펜젤러(Dodge Appenzeller)도 배재학당의 교장으로서 헌신하였으며 딸 앨리스 아펜젤러 (Alice Rebecca Appenzeller)도 이화학당을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으니 그와 그의 가족이 함께 우리나라 교육에 이바지한 것을 우리 국민 모두가 참으로 높이 기려야 할 것입니다. 당시 정동은 변란이 많던 시기라 지내기에 불편한 곳이었지만 초기 정착한 선교사와 의사 가족이 함께 모여 살면서 각기 그들의 뜻을 펼치던 유서 깊은 장소입니다. 이화학당을 설립한 스크랜턴 부인(Mary Scranton, 1832~1909)과 스크랜턴 의사, 연세대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한 언더우드 선교사(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와 알렌 선교사/의사(Horace Newton Allen, 1858~1932)의 가족 등이 서로 가까이 내왕하면서 만리타향에서의 고달픔을 달래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아펜젤러는 선교사로서 1885년 10월에 정동 자신의 사택 예배를 시작으로 1889년 7월 베델예배당(사적 256호)을 설립한 이래 계속 교회 사업을 확장해갔으며 베델예배당은 현 정동제일교회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안수를 받았으며 정동제일교회 건물 설립에도 크게 기여한 최병헌 목사가 1902년 제4대 담임목사가 된 후부터는 조선인 목사가 계속 담임목사를 맡아왔습니다. 배재학당의 초기 학생이었던 이승만 전 대통령이 한때 이 교회의 장로로 사역한 것도 기억할 만한 일이며 7대 담임목사를 맡았던 분은 교회 장로 한 분과 함께 3.1 독립선언에 참여한 33인에 속하기도 하였습니다. 이화학당의 학생이던 유관순은 이 교회의 신도였으며 그의 장례식 또한 이 교회에서 치러진 점으로 미뤄볼 때 정동제일교회가 우리나라의 독립에도 적지 않이 기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펜젤러 목사는 1902년, 44세가 되던 해에 성서 번역 관련 일로 제물포에서 목포로 여행하다가 선박 충돌 사고를 맞아 일행 중 물에 빠진 조선인 여학생을 구하려다 그 자신까지도 목숨을 잃었으며 그의 시신은 그 조선인 여학생과 다른 승객 한 명과 함께 어청도 근해에서 영영 돌아오지 못한 채입니다. 지금 양화진 선교사 묘역의 아펜젤러 목사의 묘는 가묘(假墓)라고 하니 그의 죽음 또한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약관의 선교사로 머나먼 이국에 와서 선교뿐 아니라 이 나라의 신교육을 정착시키는 데에 열정을 바치다가 짧은 일기로 생을 마감한 아펜젤러 목사를 생각하면 말 못할 안타까움 속에서 절로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아펜젤러 목사의 일생을 기리다보면 이 시대 우리 교육에 대한 만 가지 생각이 떠울라 착잡한 마음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가 27세의 젊음으로 이국땅에 와서 비명에 가기 전까지 17년 간의 노력을 교육에 쏟아 부은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부끄러운 마음이 듭니다. 그가 시작한 신교육을 바탕으로 우리 교육이 발전하여 우리나라가 교육대국이 되었고, 그 교육을 바탕으로 경제대국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지금처럼, 단군 이래 가장 잘살게 된 것은 무엇보다 신교육으로부터 시작된 교육의 힘이라는 것은 남들보다도 우리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시대 유치원부터 대학교까지 교육자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현실을 생각하면 참담한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을 만들어내야 할 중등교육 기관은 입시를 위한 학원으로 전락하고 인재를 배양해야 할 대학 또한 구직을 위한 준비기관으로 전락하였습니다. 아펜젤러나 언더우드와 같은 헌신적인 교육자는 이제 볼 수 없기에 그분들의 존재가 더욱 크게 다가옵니다. 교육입국에서 이제 교육망국으로 전락할 조짐이 보인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 나라 지도자와 이 나라 교육자들은 한 번쯤이라도 정동에 와서 아펜젤러 목사의 조상 앞에 서서 진정한 교육자로서 그의 교육이념과 그의 교육에 대한 열정을 되새겨 볼 일입니다. 올바른 교육 없이 올바른 인물이 나올 수 없고 올바른 인물 없이 올바른 사회를 기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