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림단상 190321] 우리 사회, 이것만은 바꾸자(8) - 사실(fact) 보도 통해, 가짜 뉴스가 자라는 토양을 바꾸자!
혼돈스럽기 짝이 없다. 가짜 뉴스가 판치는 세상에 그 진위를 가려줄 기준이 없다. 진영으로 나뉘어 진흙탕 싸움을 벌이는 정치권과 준 정치권은 그렇다 하더라도, 진실 보도를 생명으로 삼는다는 언론계와 ‘확실성’을 찾아(quest for certainty) 헤매는 학계까지 온통 때로 얼룩져 있다. 심지어 거룩한 ‘정의의 저울’을 앞세우는 사법계도 ‘권력 때’와 ‘돈 때’로 얼룩져 있다. 때때로 ‘진짜 목표(real goal)’를 감추는 행정기관의 언술도 믿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도대체 믿을 만한 기준이 없다.
그렇다고 손 놓고 한탄만 할 수는 없다. 믿음의 회복은 그래도 언론계와 학계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H신문 창간 직후, 신참 기자들까지 ‘사실’ 전달에 초점 두는 ‘스트레이트 기사’보다는 ‘주장’을 펴는 평론 기사를 쓴다는 기존 언론들의 비판이 쏟아졌다. 범람하는 ‘뉴미디어’에서 사실과 주장을 뒤섞어 혼란을 초래하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요즘은 기존의 권위지(?)들까지 사실과 주장을 뒤섞어 혼란을 가중하고 있다.
‘광우병 파동’ 당시 기자 출신의 한 친구가, 기자보다는 피디(producer) 중심 방송 보도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실체적 진실 규명을 위한 ‘사실’ 보도에 치중하는 기자보다는, 미리 정해 놓은 ‘주장’을 펴기 위해 입맛에 맞는 자료만을 골라 스토리를 구성하는 데 이골이 난 피디들의 ‘사실 조작(?)’ 행태를 비판하는 것을 들은 바 있다. 언론의 생명은 ‘주장’보다는 ‘사실 규명’에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해석된다. ‘사실 보도’ 보다 ‘주장’만을 펴는, 본말(本末)이 뒤집어진 언론은 그 존재 이유를 상실한 것이다. ‘가짜 뉴스’가 양산될 수밖에 없는 토양이 형성된 것이다.
‘폴리페서(polifessor)’가 넘쳐나는 학계도 신뢰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지식인 용병(intellectual mercenary) 역할을 마다않는 학계 인사들에게 ‘학자적 양심’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도 신뢰 회복은 언론계와 학계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고 시작되어야 한다. 가짜 뉴스가 넘쳐나는 ‘1인 미디어’, ‘뉴미디어’ 시대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 토양을 바꾸는 지루한 작업이 지속되어야 한다. 가짜 뉴스가 들불 번지듯 순식간에 확산되는 ‘1인 미디어’, ‘뉴미디어’ 환경에서 [찬성2-반대2-중도1]의 고전적인 다섯 출처(source) 원칙을 고수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찬성1-반대1-중도1] 세 입장의 취재 대상을 모두 접촉하여 사실(fact)을 규명하고자 하는 노력은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언론의 신뢰가 회복되어야 가짜 뉴스가 자랄 수 있는 토양이 바뀔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신뢰 사회 구축을 위해서는 그보다 먼저 학계의 노력이 기반이 되어야 한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교육학자인 듀이(John Dewey)는 학문 활동을 함에 있어 ‘확실성의 탐구’를 강조하였다. 오스트리아 태생의 영국 철학자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하라(Wovon man nicht sprechen kann, darüber muß man schweigen.)”고 호통쳤다. 그리고 20세기 초 사회과학계를 풍미한 행태주의(behaviorism)는 사회과학의 과학화를 위해 ‘사실’과 ‘가치’의 엄격한 구분을 처방하였다. ‘주장’을 담고 있는 ‘가치’를 배제해야 사회과학의 과학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언론 보도에서 ‘사실’과 ‘주장’을 분리해야 구성원들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 ‘주장’만 있어서는 광화문과 대한문의 갈등을 결코 극복할 수 없다. 그대로 방치되면 해방 직후 혼란기에 보았듯이, 각목 싸움 대나무창 싸움으로 발전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주장’이 없는, ‘사실’만을 보도하는 순수 언론의 출현을 기대해 본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거니와 사실(fact) 보도를 통해 가짜 뉴스가 자랄 수 있는 흙을 바꾸는 일이 우리 사회의 무엇보다 긴요한 과제라 할 것이다. 아울러 곡학아세(曲學阿世)하는 지식인들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