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림단상 190909] 우리 사회, 이것만은 바꾸자(12) - ‘결과적 정의’와 ‘절차적 정의’를 구분하자!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2월의 취임사에서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자가 득세하는 굴절된 풍토는 반드시 청산되어야 합니다. 원칙을 바로 세워 신뢰사회를 만듭시다. 정정당당하게 노력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사회로 나아갑시다.”고 ‘정의’를 내세웠다. 그 뒤 우리나라의 식자(識者)들은 “공평한 제재와 정의가 물과 강처럼 흐르게 하라(let judgement run down as waters, and righteousness as a mighty stream, 아모스 5:21~27 )”는 구약성서 구절을 인용, ‘정의’의 가치를 앞세우기 시작했다. 14년 뒤인 2017년 문재인 대통령도 취임사에서 기회가 평등하고, 과정이 공정하며, 결과가 정의로운 나라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2019년 여름 한국 사회는 한 장관 후보자의 임명 여부를 둘러싸고 보수와 진보의 두 진영으로 나뉘어 큰 논란을 빚었다. 이러한 논란은 정의(正義) 개념을 명확히 밝혀 정의(定義)하지 않고 추상적으로 사용하는데서 그 부분적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정의(正義, justice)와 공정(公正, fairness)의 가치어는 평등(平等, equality)을 ‘서술적 구성요소(descriptive component)’의 핵심으로 담고 있다. 1987년의 개정 헌법에 등장한 ‘경제의 민주화’ 개념(제119조) 속에 들어 있는 ‘민주’라는 용어의 밑바탕에도 ‘평등’이 서술 개념으로 자리하고 있다. ‘평등’의 극단은 ‘공산주의’ 이념과 연결된다는 차원에서, ‘평등’보다는 ‘자유’의 가치를 위에 놓는 자유(자본주의) 진영에서는 ‘형평(equity)’의 개념을 내세워 두 가치의 조화를 꾀한다. 철학자들은 ‘평등’의 개념을 ‘절대적 평등’과 ‘상대적 평등’ 또는 ‘결과적 평등’과 ‘절차적 평등’ 등으로 나누어 끝없는 논쟁을 전개하기도 한다.
‘정의’의 개념도 ‘결과적 정의’와 ‘절차적 정의’로 구분해 살펴볼 수 있다. ‘결과적 정의’는 궁극적으로 ‘절대 평등’을 지향할 것이나, ‘자유’의 가치를 우위에 놓는 자본주의 진영에서는 ‘평등’을 ‘형평’의 개념으로 번안하여 ‘자유’가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다. ‘자유’와 ‘평등’은 어느 하나를 버리고, 다른 것을 선택해야 하는 ‘배타적(exclusive)’ 관계에 있는 가치들이 아니라, 양자가 모두 인간 사회에서 중요시되어야 할, 다시 말하면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가치들이다. 지난 수 천 년 동안의 인류 역사가 이를 증언하고 있다.
논의를 ‘경제’에 적용해 보면 ‘결과적 정의’와 ‘절차적 정의’의 관계를 더 선명하게 그려 볼 수 있다. ‘자유’를 중시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절대 평등’을 지향하는 ‘결과적 정의’보다는, 그것을 지향하지만 반드시 고집하지는 않는 ‘절차적 정의’를 추구한다. ‘절차적 정의’는, 특히 미국 사회에서, ‘기회 균등(equal opportunity)’의 원칙으로 전환・진화되었다. ‘기회’가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공평하게 열려 있는 사회에서는 애써 노력하는 사람에게 성공의 기회가 주어질 것이며, 그러한 사회가 바로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라고 일반적인 미국인들은 믿고 있다. 대다수 미국인들은 많은 사회적 갈등과 큰 변혁을 초래할 ‘결과적 평등’을 추구하기보다 이들 가치재에 접근할 ‘기회의 평등’을 강조하는 이념적 선택을 한 것이다. 미국인들은 특히 교육기회의 평등을 중시한다. 미국의 수많은 정치인, 교육정책결정자, 학부모들은 ‘좋은 교육’이 곧 식권(食券, meal ticket)을 보장해주는 수단이 된다는 믿음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결과적 평등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학자들은 기회 균등의 규범만으로는 심화된 양극화를 치유할 수 없다는 한계를 지적하면서, 사회적 가치들의 보다 직접적인 재분배를 강조한다. 하이에크(Friedrich Hayek)와 같은 자유주의 경제학자들도 추상적 ‘사회 정의’는 물론 ‘기회 균등’의 이데올로기도 마찬가지로 ‘덧없는 희망(mirage)’일 뿐이라고 폄하한다. 특히 기득권 구조가 깊이 뿌리내린 계서제 사회에서 ‘기회 균등의 이념’은 기득권 집단에 대한 약자 집단의 도전을 호도(糊塗)하기 위한 정치적 수사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2019년 여름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군, 이른 바 ‘조국의 정의(正義)’ 논란은 ‘절차적 정의’와 ‘기회 균등’의 원칙이 곧바로 ‘결과적 정의’로 연결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부분적으로만 실정법으로 전환된, 아직 구멍(loophole)이 숭숭 뚫린 ‘기회 균등의 원칙 즉 실정법’만 어기지 않으면 그것이 곧 ‘정의’라고 생각하는 일부 지식인들의 신념화된 경직적 사고 구조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기회 균등의 규범과 ‘절차적 정의’는 궁극적 정의 즉 ‘평등 사회’를 구현하는 중요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우리 사회의 적지 않은 구성원들은 ‘결과적 정의’에 기여하지 못하는 ‘절차적 정의’의 강조는 약자 집단의 도전을 억제하기 위한 이데올로기 조작에 불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인지하고 있다. 그리고 기득권 집단이 최소한의 ‘절차적 정의’조차 지키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