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롯 열풍 - 노래가 뭐길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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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노래 잘하는 민족으로 이태리와 한국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는 얘기를 많이 합니다. 60, 70년대에 성악을 공부하는 한국 유학생이 이태리에 가서 호텔방에 짐을 두고 곤돌라 관광을 하다가 곤돌라 사공이 노래하는 걸 듣고 그길로 바로 짐을 싸서 돌아왔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국제 성악 콩쿠르에서 입상을 하는 건 이태리인보다도 한국인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성악이 그럴진대 대중가요도 별반 사정이 다르지 않을 듯합니다. 가무를 좋아하는 민족의 DNA가 갈수록 더 진하게 발현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코로나 시대, 티브이 화면 앞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다 보니 우리 대중가요를 자주 듣게 됩니다. 그러다가 우리 삶에서 노래가 뭔가, 하는 부질없는 생각에 잠겨보기도 합니다. 방송이 주는 오락은 드라마, 영화, 스포츠, 먹방, 낚시, 바둑 등 다양하지만 사람들의 시선과 마음을 오래 붙잡을 수 있는 건 가요 프로그램일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대중의 인기를 끄는 것은 역시 트롯입니다. 최근의 한 트롯 오디션 프로그램이 기록한 35.7%의 시청률이 이를 증명합니다. 작년과 올 초에 방영되었던 TV조선의 '미스트롯'과 '미스터트롯'이 이른바 '트롯 열풍'을 일으키면서 다른 방송사들도 잇따라 트롯 오디션 프로그램들을 내보내고 있습니다. MBC의 '트로트의 민족' SBS의 '트롯의 신이 떴다'(12.23 종영) 등도 TV조선 못지 않게 기획이 창의적입니다. 이에 질세라 KBS도 '트롯 전국체전'이라는 색다른 이름의 오디션 프로그램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여기에 TV조선의 '미스트롯 시즌 2'가 가세하여 우리 가요계는 바야흐로 트롯 황금기를 맞고 있습니다. 참가자만이 아니라 방송국 간에도 트롯 전쟁이 한창인 것이죠. 어느 한 오디션에 참가 신청을 낸 사람이 1만에서 2만 정도라니 트롯 열품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겠습니다. 어떤 프로그램을 봐도 감동을 주는 무대가 적지 않습니다. 뛰어난 가창력과 공연의 완성도 때문에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참가자들이 트롯 본선 무대에 오르기까지 들인 피나는 노력과 그들의 절절한 사연이 소개될 때마다 참가자와 관객이 함께 눈물을 글썽입니다. 심사위원들도 눈물을 찍어내기 바쁩니다. 감동의 파도가 장내는 물론 시청자들의 안방에까지 몰려옵니다. 이런 판이니 트롯은 국민적 감성의 결정체라고 할 만합니다. 과연 노래가 뭐길래 우리는 이처럼 노래에 열광하는 것일까요? 클래식에 안주하던 저를 대중가요 팬으로 만든 것은 오래전에 종료된 MBC의 '나는 가수다'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매주 일곱 명의 인기가수들이 나와서 치열한 경연을 벌이곤 했습니다. 저는 우리 가요를 들을 기회가 많지 않아 어떤 노래가 인기가 있고 누가 유명한 가수인지를 거의 모르고 지내왔습니다. 그러다가 10여 년 전 귀국하여 이 프로그램을 보다가 우리 대중가요의 매력에 빠지면서 팬이 된 것이지요. '나는 가수다'에는 국내 최고 인기가수들이 다 나왔고 장르 불문한 인기 가요들이 다 불렸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트롯이 크게 맥을 추지는 못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트롯이 지금처럼 화려하게 부활한 것은 TV조선의 '미스트롯' '미스터트롯' 시리즈 때문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전까지 트롯은 타 장르에 밀려 뒷전으로 나가앉은 모양새였습니다. 한때 대중의 사랑을 받던 트롯계의 거성들도 이름만 남기고 무대에서 거의 사라진 듯했습니다. 물론 트롯 신세대 유명 가수들의 꾸준한 활동으로 트롯의 명맥이 유지돼 오긴 했죠. TV조선의 오디션 프로그램이 이런 흐름을 확 바꾸어놓았습니다. 2류, 3류 무대를 돌며 오랜 무명 생활을 해오던 현역 가수들뿐 아니라 오디션 기회를 인생의 새 승부처로 삼은 미래의 남녀 가수들이 각 방송사 무대에서 열띤 경쟁을 벌여오고 있습니다. 트롯의 부활은 지나간 트롯 스타들의 부활이기도 합니다. 오디션을 계기로 왕년의 트롯 스타들이 심사위원으로 중앙 무대에 등장함으로써 트롯의 역사가 다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현장 심사평을 통해 참가자 개개인의 장점과 결점을 족집게처럼 짚어줍니다. 참가자들로서는 다른 어떤 곳에서도 배울 수 없는 '신의 한 수'를 배우는 것이지요. 마치 장인(匠人)이 도제(徒弟)에게 결정적인 한 수를 가르쳐주는 것과 같습니다. 이들 트롯 스타들뿐만 아니라 작곡가, 작사가, 제작자, 연출가 등 가요계 전문가들이 심사위원석에 포진하여 송곳 코칭을 해줍니다. 1920년대에 태동하여 100여 년의 역사를 맞는 트롯에는 아리랑처럼 시대를 관통하는 정서가 담겨 있습니다. 요즘 트롯 경연 무대에서는 50년대의 흘러간 옛노래부터 70년 세월을 겪어온 가요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불리면서 새로운 노래로 탄생하기도 합니다. 오래된 노래들이 젊은 참가자들의 감성으로 재해석되면서 다시 젊어지기도 합니다. 젊은 층 시청자들로서는 들어보지도 못한 옛 노래지만 그 속에 담긴 시대의 정서가 되살아나 트롯의 역사가 새롭게 조명되고 세대와 세대 간 연결이 이루어집니다. 트롯은 시간적으로만이 아니라 공간적으로도 확산됩니다. 싸이와 방탄소년단이 케이팝으로 외국 젊은이들의 감성을 사로잡음으로써 한국 대중문화의 매력을 세계로 확산시켜주었습니다. 이런 추세를 타고 이번에는 외국의 젊은이들이 우리 트롯 오디션들에 꽤 많이 참가하고 있어 반가움과 함께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케이팝에 빠져서 한글까지 배우게 된 열정적인 우리 가요 팬들입니다. 어려운 트롯 창법을 배우고 익혀 내국인들과 동등하게 공연에 나선다는 것은 엄청난 노력이 아니고서는 안 될 것입니다. 케이팝 못지 않게 우리 트롯의 해외 진출 가능성을 엿보게 하는 대목입니다. 가요계에서는 벌써 K트롯이란 말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노래는 힘겹게 살아오는 우리나라의 보통 사람들에게 카타르시스이자 삶의 에너지입니다. 오디션이 아니라도 노래방, 작업장, 가정에서 저마다 흥겹고 신명나게 노래를 부르곤 합니다. 우리 대중예술의 저변에 있는 정(情)과 한(恨)의 정서가 흥과 끼를 통해 표출되는 것을 보면서 관객은 이에 공감하고 위로와 치유를 받습니다. 공감과 치유가 전국민적으로 퍼지면 그것이 삶의 에너지가 되고 힘이 됩니다. 트롯을 비롯한 수많은 우리 대중가요 명곡들을 곰곰이 새겨보면 삶의 고달픔, 사랑과 이별, 애환과 소망 등이 주를 이루지만 이는 결국 삶에 대한 긍정적인 에너지로 승화됩니다. 그런 에너지로 한민족이 쓰러지지 않고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