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림단상 2020/12/09> 정겨운 나한상과 큰바위얼굴
‘부처의 경지를 이룬 중생(衆生)’으로서의 나한상(羅漢像)이 언제부터인가 정겹고 가깝게 느껴진다. 그림이나 조각으로 표현된 나한상에는 부담스러운 권위가 없고, 자유스러운 그 표정은 익살스럽기까지 하다.
산스크리트어 Arhan을 음역한 아라한(阿羅漢)의 줄임말인 나한은 대승불교(大乘佛敎, Mahāyāna Buddhism)냐 소승불교냐(小乘佛敎, Hīnayāna Buddhism)에 따라, 그리고 시기에 따라 조금씩 다른 의미를 지닌다. 십육나한을 모신 응진전(應眞殿), 오백나한을 모신 오백나한전과 같은 별도의 전각이 없는 것은 아니나 대개 삼존불(三尊佛) 또는 오존불(五尊佛)의 좌우에 그 배경으로 배열된다는 차원에서, 나한은 이미 해탈의 경지에 도달한 성자를 가리키나 공식적으로 부처님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 중생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초기 불교(early Buddhist schools)에서 아라한은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사람 즉 부처님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그 이후 아라한은 부처님과 구별돼, 부처님의 제자가 도달하는 최고 깨달음의 경지를 의미하게 됐다. 대승불교에 이르러서는 불자들의 목표가 무수한 생을 거듭해서라도 스스로 부처님이 되는데 있었으므로, 아라한은 수행자를 일컫는 말이 되었다.
나한상이나 나한도에는 일정한 의궤(儀軌)가 적용되지 않아, 그 모습이 다양하고 자유스럽다. “실수로 깬 옥등을 멀쩡하게 붙여놓았다”는 일화에서 보듯이 ‘나한 신앙’에는 또한 기적(奇蹟) 행하는 성모상과 같이 신묘한 영험담이 뒤따르기도 한다. 스님을 괴롭힌 500명의 도둑이 500나한이 되었다는 일화도 있다. ‘팥죽 먹은 나한님’이라는 일화에서 보듯이 나한은 인간적이다.
<다양한 표정의 나한상들>
나한상은, 세계 여러 곳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고 주장되는, 미래의 염원을 담고 있는 ‘큰바위얼굴’과 같은 ‘영웅상’과 대비된다. 아직 ‘중생’이기 때문이다.
평화통일운동을 하는 한 지인이 2020년 11월 27일 미국 뉴햄프셔 주의 Union Leader에 기고한 “The Great Stone Face now watches over Korea”라는 제목의 글과 사진을 보내왔다. 뉴햄프셔 주 프랑코니아 주립공원 내의 화이트마운틴에 있던 ‘산의 노인(The old man of the mountain)’ 상(像)이 2003년 5월 붕괴되었는데, 한국의 영암 월출산에 위인의 탄생을 예고하는 그 ‘큰바위얼굴’이 나타났다는 내용이었다. 월출산은 한국 풍수지리의 시조이며 대가인 도선국사(道詵國師)의 예언이 숨쉬는 영산(靈山)이다. '산의 노인'은 호손의 유명한 '큰바위얼굴'의 모티브를 제공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월출산의 ‘큰바위얼굴’은 사진작가 박철 씨가 2009년 1월 31일 해뜨기 직전의 안개 낀 산악 풍경을 촬영하면서 우연히 발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왼쪽은 붕괴되기 이전의 ‘산의 노인’ 사진이며, 오른 쪽은 붕괴된 후의 사진이다>
호손의 단편소설 큰바위얼굴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미국 남북전쟁(1861∼1865) 직후, 소년 어니스트(Ernest)는 어머니로부터 마을 앞 깎아지른 듯 한 절벽 위에 있는 사람 형상의 ‘큰바위얼굴’에 관한 얘기를 듣는다. “언젠가 큰바위얼굴을 닮은 위대한 사람이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전설이 있었으나 아직 그 사람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얘기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어니스트는 큰바위얼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되는 여러 사람을 만난다. 큰 부자, 위대한 장군, 성공한 정치인, 그리고 천재 시인…. 그러나 그들은 모두 그가 기다리던 큰바위얼굴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전도사인 어니스트가 해질 무렵 야외에서 동네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고 있던 모습을 본 천재 시인은 소리 높여 외쳤다. “보시오! 보시오! 어니스트야말로 큰바위얼굴과 똑같습니다.”
<영암 월출산의 큰바위얼굴>
시인의 얘기를 들은 사람들은 어니스트가 ‘큰바위얼굴’을 닮았으며, 예언이 실현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정작 어니스트는 아직도 자기보다 더 현명하고 착한, 큰바위얼굴을 지닌 위인이 나타나기를 마음속으로 기원하였다.
민주 사회에서는 큰바위얼굴을 닮은 한 사람의 위인보다는 깨우친 오백나한들이 혼탁한 세상을 더 잘 정화시켜 줄 것으로 기대된다. 한라산 영실의 오백나한이 그리운 이유다.
<한라산의 영실기암과 오백나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