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綿)의 제국, 면의 세상
2015년에 출간돼 뉴욕타임스로부터 그해 10대 베스트셀러로 호평을 받은 '면의 제국'(Empire of Cotton by Sven Beckert, Vintage)이라는 책 원서를 얼마 전 시내 한 서점의 서가에서 우연히 만나 구매했습니다. 면(綿)이라는 것에 대한 친밀감과 어떤 향수 때문에 그 책에 손이 가게 되었을 것입니다. 실크와 면직을 놓고 보면 전자는 보기도 좋고 감촉도 좋지만 사치스럽고 귀족 같은 느낌이 드는데 후자는 수수한 모양과 편한 감촉이 중산층이나 서민 같은 느낌을 줍니다. 늘 입는 내의를 생각하면 면이 고맙기만 합니다. 기능성이 좋은 새 섬유들이 나오고 있지만 피부에 닿는 살가움과 자연스러움 때문에 내의로는 평생 면을 떠나본 적이 없습니다. 의생활에서 면이 주는 친밀감은 실크든 신소재든, 다른 어떤 섬유도 따라올 수 없을 것입니다.
면에 대한 향수는 솜이불로 더욱 풍성해집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묵직한 것을 어떻게 덮고 잤을까 싶기도 한 솜이불은 작은 방에서 한 가족이 오밀조밀 함께 덮으며 추운 겨울을 보내던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한 철 솜이불을 덮다가 봄이 되면 동네 솜틀집에 가서 뭉쳐진 솜을 다시 부풀도록 말끔하게 타서 오곤 했는데 어머니를 따라 솜틀집에 가 그 많은 솜이 처리되어 가득히 쌓여 있는 것을 보고 감탄하던 기억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신혼 때 처음 가져보는 풍성한 솜이불은 요즘의 고급 화섬이나 오리털 이불보다 신혼생활에 대해 더 풋풋한 기대를 품게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살아오면서 정작 솜의 근원인 목화는 제대로 보지 못한 듯합니다. 초등 때인 1950년대면 안동 지역에도 목화밭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일부러 찾아본 기억은 없습니다. 그 시절 교과서에서 고려 때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몰래 가져와 우리나라에 퍼뜨렸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대단한 사건이라는 생각을 해오긴 했지만 그 씨나 꽃, 또 꽃이 만개해서 터져나온 솜을 제대로 보진 못해서 아마도 솜과 면에 대한 향수와 궁금증이 계속 남아 있었나 봅니다.
십수 년 전 이집트에서 근무할 당시 이집트 면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것으로 알려진 만큼 이집트 면에 대해 알아보고 싶어 어느 날 카이로 인근의 목화밭을 구경하러 갔습니다. 이집트 면은 실로 짜면 올이 길게 나와 여느 면보다도 탄탄하고 질기다고 합니다. 면사로서 경쟁력이 높아 유럽의 유수한 면제품들은 이집트 면사로 짠다는 얘기도 있죠. 저희 집에서는 십수 년 전 이집트에서 사온 침대보를 지금까지 쓰고 있는데 여전히 촉감이 좋고 튼튼함을 자랑한답니다.
마침 우리 기업이 운영하는 방적공장이 카이로에 있어 그분들의 소개를 받아 카이로 교외의 목화밭을 쉽게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한여름 목화밭에서는 여전히 많은 남녀노소 노동자들이 밭을 이리저리 다니면서 손으로 목화를 따서 큰 부대에 넣어 트럭에 싣는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두 세기 전 미국 남부의 목화밭에서 흑인 노예들이 강제 노동을 하던 장면이 연상되었습니다. 땡볕에 저도 밭에 들어가서 목화를 좀 따보기는 했는데 정말 힘들고 따분한 작업임을 금세 느낄 수 있었지요.
그런저런 연고로 위에 말한 '면의 제국'이란 책을 보자마자 바로 구입하기로 마음먹었을 것입니다. 이 책은 목화 재배의 역사와 지리, 면산업과 면 무역의 발전 과정, 그리고 면산업이 영국에서 산업혁명과 맞물려 자본주의를 일으키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다는 점 등을 실감 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18, 19세기 면산업은 아마도 지금의 자동차 산업에 비견할 만큼 당시의 핵심 산업이었습니다. 면산업에서 이룬 자본축적이 다른 산업의 발전으로 연결되었습니다.
면 재배의 역사는 기원전 4천, 5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주로 열대나 아열대 지역에 자연적으로 생장하다가 농경시대에 들어와 인류에 의해 재배되기 시작했습니다. 중남미, 아프리카, 이집트, 인도 등지를 중심으로 경작되었으며 면직과 면 의류가 보편화되면서 중국, 미국 남부 등 세계 각지로 퍼져나갔습니다. 크기나 목화의 모양 등으로 크게 보아 네 종류의 면 종자가 있는데 올이 길고 질긴 이집트 면 외에 부드럽고 윤기가 많은 멕시코 면이 우수 품종으로 알려져 있죠.
멕시코 면을 기반으로 하는 미국의 면 수출은 한때 세계 전체 면 수출의 90%를 차지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면과 노예 노동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증명하는 현상이기도 하죠. 1860년대 남북전쟁 당시 미국의 대유럽 면 수출이 일시 중단됨으로써 이집트의 면 가격이 폭등한 적이 있습니다. 이는 이집트 왕실에 큰 부를 안겨 주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이후 정상 회복이 되면서 한동안 재정 낭비를 일삼았던 이집트가 결국 수에즈운하 소유권을 영국에 넘겨야 했던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습니다.
면산업, 특히 면 재배에서는 무엇보다 목화를 손으로 따서 하나하나 씨를 빼는 일이 가장 힘든 과정이었다고 합니다. 점차 기계를 사용하여 수확하고 씨를 뺄 수 있게 되고 효율적인 방적기계가 발명되면서 면산업은 가내 생산에서 공장 생산으로 발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8세기 증기기관의 발명에 힘입어 방직산업은 다시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죠. 비대해진 방직산업과 임금노동이 산업도시들을 일으키면서 본격적인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자본주의가 현대적으로 진화하는 계기가 됩니다. 증기기관으로 인한 육상, 해상 수송의 획기적인 발전으로 멀리 떨어진 면 재배지와 도시의 방직공장이 효율적으로 연계되면서 면산업은 세계적으로 확산됩니다. 자본주의 생산.소비 체제가 세계적인 규모를 갖추면서 이른바 '면의 제국'이 형성되었던 것이죠.
당시 영국이 이 과정을 주도하였는데 식민지 개척과 함께 노예노동, 아동노동 등이 수반됨으로써, 인류 문명을 눈부시게 발전시켜 온 산업혁명과 자본주의는 한편으로 임금착취, 인권유린, 부의 불평등 등 산업사회의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습니다. 저자에 의하면, 18, 19세기 면산업의 비약적인 발전은 세계적 부의 불평등을 가져온 계기가 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영국이 주도한 면의 제국에서 산업화된 대도시로서 맨체스터(상공회의소가 면 제국의 지도부)가 그 중심에 있었고 리버풀(면 수출입협회가 중추) 등도 세계 면 무역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미국 동부의 도시들도 방직산업의 확산 추세를 타고 산업도시로 성장해왔습니다. 한 세기 동안 면의 제국 중심에 있던 이런 대도시들에서는 면산업이 사라진 지 오래되었으며 그 흔적은 방직공장을 개조하여 꾸민 면산업 박물관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죠.
오늘날의 세계 면산업은 중국(재배 면적의 29%)과 인도(21%)가 주도하며 그외 남, 동 아시아와 중남미 등이 따라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들이 면 재배뿐만 아니라 면직물 생산을 주도하면서 오늘날 면의 제국은 북부에서 남부로 내려온 셈이죠. 면 재배에서는 미국이 여전히 큰 부분(14%)을 차지하고 있긴 합니다. 지금 플로리다를 비롯한 미국 남부에는 2,500여 개의 면 재배 농가가 있는데 이들이 정부로부터 막대한 보조금을 받는 것에 대해 개도국들이 세계무역기구에서 불평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한때 면산업의 주도 세력이 유럽과 미국의 동부에서 중국, 인도 등 개도국들로 이전, 재편되면서 산업화와 자본주의도 더불어 남쪽 개도국들로 퍼져나갔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입는 면 의류는 대부분 이런 개도국에서 생산된 것이죠.
쉽게 구하고 즐겨 입고 즐겨 쓰는 일상의 면에 수천 년의 역사가 있고 그 속에 커다란 빛과 그림자가 있음을 이 책을 통해 다시 한번 상기해볼 수 있었습니다. 면은 주로 티셔츠, 청바지 등 의류나 타월, 침구 등에 사용되지만 지폐, 커피 필터, 식용유, 비누, 심지어 화약에까지 원료로 들어간다고 합니다. 면을 빼놓고는 인류의 삶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실크가 멋지고 화려하다고, 화학섬유가 기능성이 좋고 편리하다고 이토록 긴 세월 인류와 고락을 함께해 온 면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매일매일 세탁되어 서랍에 넣어두는 면 내의를 볼 때마다 면의 소중함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