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막걸리 즐긴 친구 장두환을 떠나보내며
친구 장두환이 장수막걸리를 즐긴 것은 알고 있었지만, 호(號)가 ‘소아’라는 사실은 영결식을 치르면서 알게 되었다. 고인의 고교동창으로 외교학과를 함께 다닌 장영섭 전연합뉴스사장을 통해서였다. 청류 친구들끼리는 오십년지기라고 하면서도 아는 것이 별로 없었던 것이 아닌지. 연전 청류 모임에서 고인이 느닷없이, 서로의 이해 폭을 넓히기 위해 각자가 살아온 얘기를 해 보자고 하면서 본인부터 먼저 시작하겠다고 한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의 갑작스러운 제안은 무언가 느낀 점이 있어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몇 달 전 청류 친구들의 최근 주소를 묻더니 모두에게 선물을 보낸 점도 그렇고. 정우성 대사 주관으로 진행된 ‘살아온 얘기’ 프로그램은 아쉽게도 이장우 목사의 종교관과 종교 생활을 듣는 것을 끝으로 더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호응이 적어 그랬던 것인지, 나서기 싫어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연사 구하기가 어려워 그랬던 것인지.....
경황 중에 그 흔한 추모사 한 줄 없이 오랜 친구를 떠나보낸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린다. 친구를 자연으로 돌려보낸 장지(葬地)에서, 어렵게 시내까지 가서 구해온 장수막걸리로 회포를 푼 걸로 위안 삼은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기회야 또 있겠지. 세계적 명품들을 모아 전시하는 루브르 박물관에서는 작가 사후 60년이 지나야 전시토록 한다지 않는가.
친구와의 갑작스러운 이별은 많은 것을 생각게 했다. “이젠 자네와 나 둘뿐일세”라는 한 전직 언론인의 쓸쓸한 글이 뜬금없이 떠올랐다. 서양 풍습이긴 하나 이제 그럴싸한 묘비명이라도 한 줄 생각해 두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얘기에 한 친구는 “얘기할 것은 많고?”라고 시니컬한 반응을 보였다.
유교문화권에서는 아호(雅號)가 묘비명의 역할을 어느 정도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50여 가지 호를 사용한 것으로 유명한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선생의 경우는 특히 그러하다. 그러나 아호는 지나치게 간결하다. 아호는 원래 윗사람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고 여겨 지위나 연소의 위아래를 막론하고 휘(諱)나 자(字) 외에 별명처럼 편하게 부를 수 있도록 지은 이름을 말한다. 호는 전통적으로 스승이나 어른이 지어주는 경우가 많으나, 오늘날에는 그 이름에 담고 싶은 본인의 좌우명이나 좋아하는 것 등의 의미를 선택하여 자작(自作)하는 경우가 많다. 조금 더 늘려 생각하면 호가 곧 묘비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청유모임에서는 안동 양반골 출신의 정달호 대사가 한때 아호 부르기 운동을 벌였으나 큰 호응이 없이 흐지부지되었던 것 같다.
이 글의 제목을 ....... ‘떠나보내며’로 썼는데, 이런 경우 ‘기리다’는 표현이 흔히 사용된다. ‘기리다’는 “뛰어난 업적이나 바람직한 정신, 위대한 사람 따위를 추어서 말하다”고 설명된다. 훌륭하거나 뛰어난 삶을 살아야 기림을 받게 되나? 주변 얘기를 듣다 보면, 부질없는 삶의 흔적을 하나도 남기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그래도 무언가 남기고 싶다는 친구들도 있다. 족보도 있고 비석도 있지 않은가.
아무튼 가까운 친구의 죽음은 많은 것을 생각게 했다. 서울신문 부고란은 사진과 함께 고인이 역사비평사를 운영한 일, 노무현⋅유인태⋅이철 등과 함께 하로동선(夏爐冬扇)을 운영하면서 국민통합추진위원회를 결성한 일, 반도체 부품 무역회사인 메인세일을 운영하면서 그 수익금으로 동학농민운동 연구를 익명으로 지원한 점 등을 적시하고 있다.
많은 친구들은 그가 회사 사무실과 살림집을 겸하여 사용하던 가회동에 있는 300평 규모의 옛날 베트남대사관 터를 가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집을 판 뒤 마련한 마포의 9층 빌딩 꼭대기에 자리한 펜트하우스 옥상 정원에서 한강과 여의도의 밤 풍경을 즐기면서 나라를 걱정하며 술잔을 나눈 기억도 있을 것이다. 넉넉했던 친구와 공유할 기억들은 그 밖에 많고도 많다. 친구와의 갑작스러운 이별은 무엇보다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우리가 이 시대를 살면서 무슨 의미 있는 일을 하였는지. 또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정리해보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일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였다.
다음번 청류 모임에서는 이런 문제들에 대한 의견들을 한번 나눠보는 것이 어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