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시와 삼베, 여인들의 땀과 눈물이다(2021.09.03.)
지난봄 코로나 등 어려운 여건임에도 모처럼 뜻 있는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볼 것도 많았고 들은 것도 많아 진즉에 몇 자라도 끼적였어야 하는데 다른 것에 눈이 팔려 지금에야 기억을 살려봅니다. 충남 서천과 군산을 1박 2일로 다녀오는 짧지만 굵은 여정이었습니다. 서천읍에서 점심을 하고 바로 한산면으로 가서 목은(牧隱) 이색 선생의 종가와 유택, 한산 이씨 명유(名儒)들을 모신 문헌서원(文獻書院) 등을 방문한 다음 인근의 한산모시촌에 가서 모시짜기에 관해 자세한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국립생태원을 방문하고 이어 군산 근대사 거리, 그리고 교외로 나가 채만식 문학관을 다녀온 것이니 가히 강행군이라 할 만했습니다. 군산의 묵던 호텔 부근에서 향토 출신 고은 선생의 시비(詩碑)를 만난 것도 의외의 소득이었습니다.
처음 가본 서천, 군산 지역이라 기대가 컸는데 기대한 만큼 폭넓은 견문을 할 수 있었습니다. 서천군에 한산면이 있는 줄을 이번 여행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한산의 모시짜기를 견학했으니만큼 이번에는 모시 이야기에 집중을 할까 합니다. 모시와 쌍벽을 이루는 전통 옷감인 삼베의 고장이 마침 제 고향인 안동이라서 얼마 후 안동에 들른 김에 현장에서 보고 들은 삼베 이야기를 모시 이야기와 한데 묶어보았습니다. 모시나 삼베, 다 오래전부터 선인들이 입어 지금까지 내려오는 우리 전통 옷감이자 의복입니다. 재질이 다르고 고장이 다르지만 모시와 삼베에는 우리 아낙들의 땀과 눈물과 한과 희망이 배어 있습니다. 기록에 나타난 두 옷감의 시작은 신라.백제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한산의 모시짜기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재로 등록(2011년)되어 있을 만큼 생산과정의 우수성과 특수성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안동포(安東布)는 긴 역사에도 불구하고 삼, 즉 대마(大麻)의 특수한 성분 때문에 함부로 장려할 수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모시와 삼베는 다 같이 원료 식물을 가공, 실을 만들어 직물로 짜는 것이지만 공정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합니다. 모시는 여름에 수확한 모시풀(苧草, 苧麻) 속껍질을 물에 불린 후 그대로 한 올 한 올 이빨로 째고(째기), 삼베는 수확한 삼을 뭉텅이로 찐 후 껍질을 한 올씩 손톱으로 째서 낱실을 만듭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낱실들을 잇고(매기) 풀을 먹여 고르고(삼기) 날실, 씨실로 구분하여 베틀에 걸어서 짜는 것이죠. 모시의 경우는 짠 옷감을 탈색하기도 하고 삼베는 반대로 연한 황토색을 입히기도 합니다.
모시로는 한산모시의 품질을 제일 알아주지만 모시짜기는 한산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해온 작업입니다. 서울이나 인천의 저동(苧洞)처럼 동네 이름에 모시풀 저(苧) 자가 들어 있으면 그곳은 모시를 짜던 곳이라고 합니다. 삼베도 영남의 안동포가 유명하지만 그 외에도 함경도의 북포, 강원도의 강포, 전남의 곡성 돌실나이가 있습니다. 모시짜기나 삼베짜기 다 기후 조건이 알맞은 곳에서 번성해 왔습니다. 모시는 특히 습기에 민감하여 비가 올 때나 매우 습할 때는 일을 할 수 없고 대체로 실내에서 일을 해야 했으므로 더운 여름철에는 작업 환경이 더욱 열악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안동포는 임하면 금소마을과 봉정사 지전마을이 지금까지도 삼베짜기를 하고 있는 지역인데 기후와 토질이 대마 재배에 가장 적합한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성인 옷 한 벌을 만들 수 있는 모시 한 필을 짜는 데 아낙 한 사람이 넉 달 동안 작업해야 한다니 모시짜기가 얼마나 고달픈 일인지 알 수 있겠습니다. 삼베도 마찬가지입니다. 보릿고개를 넘고 때로는 초근목피로 연명해야 했을 정도로 궁핍할 때 모시나 삼베 한 필이라도 짜야 식구들이 밥을 먹을 수 있었으니 힘든다고 마다할 수 없는 필수 노동이었습니다. 아낙들은 밭일은 물론 밥 짓고 빨래하는 일도 하면서 베짜기 일을 해야 했으니 어찌 땀과 눈물 없이 될 일이었겠습니까. 물론 거친 일은 남정네들이 도와주지만 대부분의 작업이 섬세함을 요하기 때문에 모시 짜고 삼베 짜는 일은 전적으로 아낙들의 몫이었습니다.
모시풀을 수확하여 한 올씩 입술과 이빨을 사용하여 째는데 이빨을 혹사하다 보면 이(齒)에 골이 생깁니다. 무엇이든지 반복 작업을 계속할 때 "이골이 난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모시풀을 째는 데서 나온 말입니다. 모시든 삼베든 2미터가 못 되는 낱실들을 이을 때는 아낙들이 무릎에 실 가닥을 올려놓고 비벼서 잇습니다. 모시 잇는 작업은 여송연을 말 때 쿠바 여인들이 담뱃잎을 허벅지에 올려놓고 돌돌 마는 장면을 방불케 합니다. 그래서 여인의 허벅지를 거쳐서 나온 쿠바의 시가(cigar)가 우수한 향미를 낸다고들 우스개 삼아 말하기도 하죠.
재미 삼아 쿠바의 시가 제조 과정과 비교를 했지만 카르멘이라는 오페라에도 나오듯 시가 마는 일은 그래도 단순하고 쉬운 공정임에 비해 모시나 삼베를 짜는 일은 고되기 짝이 없어 실제로 입술이 부어터지거나 이빨이 상하거나 또는 손톱이 깨지면서 손에 상처가 나기 일쑤였습니다. 땀뿐만 아니라 피까지 나는 정말 거칠고 힘든 작업임을 알 수 있습니다. 현대에 들어와 화섬 의류가 나와 모시와 삼베에 대한 수요가 줄면서 모시.삼베 짜는 일은 기피 대상 노동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완성된 모시나 삼베를 보면 곱기가 이를 데 없지만 그 이면에는 아낙들의 고달픈 삶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힘든 과정을 거친 옷을 선인들이 입고 살아온 것이니 모시와 삼베는 우리에게 참으로 귀하고 소중한 직물입니다. 모시는 고울 뿐만 아니라 가벼워서 여인들에게 인기가 높아 중국 황실에서도 조선 모시를 구해 입었는데 당시 중국에 바치는 공물에는 곱게 물들인 모시 품목들이 항상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모시는 스님들도 의류와 목수건으로 애용하였다고 하는데 절에 있는 부처상을 깨뜨리면 복부에서 모시 제품이 우수수 쏟아졌다고 합니다.
우리 가곡 중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곡이 금수현 작곡의 '그네'입니다. "세모시 옥색치마 금박 물린 저 댕기가 창공을 차고 나가 구름 속에 나부낀다... " 이 세(細)모시가 모시 중 가장 고운 모시로서 30센티미터 폭에 8백 올 이상이 들어갑니다. 4백, 5백 올 내외인 보통 모시에 비해 세모시는 짜기도 어렵고 시간도 많이 소요되므로 그만큼 값도 비쌀 수밖에 없습니다. 삼베도 최고로 치는 것을 '생냉이 길쌈'이라고 하는데 역시 30센티미터 폭에 8백 올 이상이 들어갑니다. 모시나 삼베 다 자연 섬유라서 통풍도 잘 되고 감촉도 좋으며 내구성이 있어 정말 슬로우 라이프에 딱 어울리는 옷감이지만 화학섬유가 판을 치는 오늘날에는 마냥 뒷전으로 물러나 있는 형국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시짜기와 삼베짜기 기능을 배우려는 젊은 층이 없지 않아 우리의 전통 옷감이 근근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음은 참으로 가상한 일입니다.
한 필이 약 23미터쯤 되는데 여성 옷 한 벌과 남성 저고리 하나 만들 수 있는 길이라고 합니다. 그 한 필의 값이 질에 따라 다르지만 백만 원에서 백오십 만 원이라 하니 한 아낙의 눈물겨운 넉 달 노동의 대가치고는 너무나도 박하다고 하겠습니다. 아마도 전통 기능 장려 차원에서 고안된 정부의 보조금이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 해도 귀한 우리 전통 옷감을 이렇게 내버려두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우리 국민들 중에 다소 여유가 있는 분들은, 흔한 화섬보다 모시나 삼베옷을 많이 입는 것이 전통을 지키는 일일 뿐만 아니라 친환경 의복이므로 작게나마 환경보전에도 기여할 수 있는 것이니 사 입어보시기를 권합니다. 저는 모시옷 한두 벌이 있어 더운 여름철에 가끔 입고 나다니는 호사를 누립니다.
안동포에 얽힌 저 자신의 일화입니다. 젊은 시절 멘토로 모시던 서천 출신의 한 어른에게 안동포를 선물한 적이 있습니다. 그 어른은 그 안동포로 바로 옷을 지어 입었는데 고급품이었던 만큼 과연 때깔이 났습니다. 당시에 저는 한산모시가 서천에서 나는 줄을 몰랐기에 그저 좋다고 안동포를 선물한 것인데 지금 생각하니 모시 생산지 출신 어른에게 삼베를 선물한 것이라 좀 이상하게 보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만일 그때 제가 한산모시가 서천에서 나는 것인 줄을 알았더라면 안동포를 선물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 전통 옷감으로 옷을 해 입는다는 것은 좋은 일로 여겨져 조만간 저도 고운 안동포 한 필을 구해 멋진 삼베옷을 지어 입을 요량을 하고 있습니다.
*** 일행인 서천 출신 원로 언론인 임종건 선생의 호의로 한산의 또 다른 특산품인 소곡주를 큰 병으로 한 병씩 챙겨 와 두고두고 집에서 마시면서 이번 여행의 즐거운 순간들을 한껏 되새길 수 있었던 것도 빼놓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