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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4-08-07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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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발언대] '거문도 사건'을 되짚어본다 졍달호 회원이 2024.08.02 자유칼럼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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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도 사건'을 되짚어본다

2024.08.02

고교 역사 시간에 '거문도'를 처음 접하고는 이 섬이 우리나라 어디에 있는 건지도 모른 채 1885년에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그냥 외우기만 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대학에 와서도 거문도가 남해 어딘가에 있다는 것만 알고 정확히 어디에 위치한 어떤 섬인지는 모르고 지내 왔습니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2조 영토조항(일본은 제주도/Quelpart, 거문도/Port Hamilton, 울릉도/Dagelet를 포함한 한국의 모든 영토에 대한 권리를 포기한다)에 나오는 이 '대단한' 섬을 그렇게 건성으로만 알고 있던 것이 늘 마음에 걸렸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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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도가 새롭게 저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은 지인인 고희영 감독('물꽃의 전설' 등 해녀 관련 다큐영화 감독, 2023. 9. 13일 자 칼럼 참조)이 새 영화 촬영차 거문도를 방문하여 섬 사진 몇 장을 한 SNS 채널에 올리고 나서입니다. 머릿속 한 구석에 희미하게 자리 잡고 있던 거문도가 그렇게 사진과 함께 현실의 섬으로 다가온 것이죠. 거문도는 전라남도 여수시에 속하는 섬으로서 요즘엔 관광객의 발길도 잦아지고 있다는데 저도 역사의 현장을 느껴보기 위해서라도 머지않아 거문도에 한번 발을 들여놓을 생각입니다.

거문도가 새로이 관심을 끌던 중 얼마 전 교보의 한 서가에서 거문도에 관한 구한말 외교사 연구서 한 권(김용구, '거문도와 블라디보스톡')이 눈에 띄어 망설임 없이 구입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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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도 점령 사건은 영국 해군이 1885년 4월부터 1887년 2월까지 거문도를 2년 가까이 무단 점령한 사건입니다. 지도를 보면 거문도는 어느 나라 해군이라도 탐낼 만한 전략적 이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반도 본토 남해안 맨 외곽에 자리하면서 동도, 서도 두 섬이 손바닥처럼 마주 보면서 남쪽으로 벌어져 있으며 그 가운데 고도(古島)라는 작은 섬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세 개의 섬이 바다를 둘러싸서 하나의 내해(內海)를 이루는 형상이라 군사적으로 천혜의 요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문도는 이런 장점으로 인해 옛날부터 어선들의 피항처가 되기도 하고 어업의 중개지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인 어부들이 와서 어업공동체를 이루어 살기도 하였습니다.

영국 점령 이전에 거문도에 최초로 관심을 가졌던 나라는 의외로 미국이었습니다. 그 무렵 미국은 1866년 8월 평양에서 있었던 제너럴셔먼호 사건 이래 자국민의 생존에 관한 풍문을 확인하려고 백방으로 나서던 중이었습니다. 당시 미국 아시아함대 사령관 벨(H. H. Bell)은 조선에 대한 보복 조치의 일환으로 미 해군 선박이 거문도에 주둔하면서 서울을 점령할 것을 본부 해군 장관에게 건의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거문도를 방문한 미국 관계자는 거문도를 지중해의 지브롤터에 비유하면서 훌륭한 해군기지가 될 것으로 평가합니다. 그럼에도, 당시는 미국이 지역적인 세력에 불과했던 만큼 거문도 점령을 실현에 옮길 생각은 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미국 외에도 당시 열강은 영국의 점령 이전부터, 군사요충지로서의 거문도에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영국도 실은 거문도 점령을 실행에 옮기기 10여 년 전부터 이를 적극 검토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쇄국정책하의 조선이 바깥 사정에 눈을 감고 있는 사이 프랑스, 독일, 일본 등의 해군이 조선의 해안을 수시로 탐사하고 있었으며 그런 가운데 1866년의 병인양요, 1871년의 신미양요 등을 겪으면서 조선이 무방비 상태임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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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으로서는 크림전쟁(Crimean War, 1853~1856) 후 숙적(宿敵)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서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만간 러시아와의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보았습니다. 천혜의 요새 거문도를 전진기지로 해서 블라디보스톡을 공격한다는 계획하에 1885년 4월 드디어 거문도 점령을 단행한 것입니다. 역사 시간에는 부동항을 찾아 남하하려는 러시아가 선점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점령했다는 식으로 배웠지만 시베리아철도가 부설되기 전이었던 당시 러시아는 그럴 만한 군사적 입지를 갖추지 못하였습니다. 러시아는 방어를 위해 블라디보스톡 항구에 어뢰를 설치하여 외부로부터의 공격에 대처하고자 하는 정도였다고 합니다.

점령을 획책하는 과정에서 영국은 조선을 ''야만의 나라이므로 아무런 의식(儀式) 없이 점령할 수 있다''고 보았으니 우리나라가 얼마나 허술한 상태에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영국은 중국의 속방인 조선을 직접 상대할 나라로 보지 않았기에 점령 후 철수 때까지 중국을 통해서만 교섭을 합니다. 중국으로서는 열강의 세력 확장 와중에도 자신이 조선의 종주국임을 내세우면서 현상유지 정책을 추구합니다. 중국은 거문도 점령이라는 돌발 사안에 대해 조선이 대책을 청훈(請訓)해오면 이를 불인정한다는 것으로 방향을 정하고 겉으로는 타협적 자세를 보이면서 대영 교섭에 임합니다. 결국 중국은 영국의 점령 기정사실화 기도에 합의하지 않음으로써 그동안 자신을 믿고 교섭해 왔던 영국의 분노를 사기도 합니다.

당시를 되돌아보며 특별히 저의 눈길을 끈 것은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한 후 조선 관리가 취한 조치입니다. 대외관계를 총괄하던 김윤식(金允植, 1835~1922, 당시 통리기무아문 독판督辦 )은 시종 강경 자세를 유지하면서 영국을 압박함으로써 상대를 당황하게 합니다. 현장을 탐사하고 나서 영국에 강한 항의 문서를 보내어 철수하지 않으면 영국공사관을 폐쇄하겠다는 경고를 발하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 영국이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자 조선은 열국의 공관에 영국의 점령이 만국공법(국제법)에 어긋나므로 각국이 이런 뜻을 영국측에 표명해줄 것을 요청한다는 회람문서(Circular Note)를 돌립니다. 이에 분개한 영국은 더욱 조선과는 상대하지 않고 중국을 통해 압력을 행사하려고 합니다.

역사 수업에서는 당시 조선은 무력하여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한 것으로만 알았는데 책임 있는 고위 관리가 이 정도의 대응을 한 것을 보면 나라가 사대주의 체제하에서 부패하고 무능한 가운데서도 유능한 관리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적지 않은 자부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총융사로서 프랑스 함대에 맞서 강화도 염창(鹽倉)을 수비하고 이후 1876년 일본과 조일수호조규, 나아가 1882년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을 담당했던 신헌(申櫶, 1810~1884)도 교섭 당시 시종 의연한 자세를 취하였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점령 2년여 후 영국이 거문도에서 철수한 것은 조선의 항의 때문이 아니라 정세의 흐름이 더 이상 거문도 점령을 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러시아와의 경계 획정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되어  대 러시아전을 더 이상 염두에 둘 필요가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거문도에서 철수하더라도 러시아가 거문도를 비롯한 조선의 다른 지역을 점령하지 않을 것이라는, 중국을 통한 간접적 보장이 있었기 때문이죠. 한편, 영국 내부에서도 거문도는 너무 작아서 함대를 운용하는 데에 부족하고 본토와의 거리가 멀어서 기지를 유지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은 데다 약소국 점령을 정당화할 명분이 약했다는 점을 고려하였던 것이죠.

크게 보면 영국의 거문도 점령은 상기 저자가 지적한 것처럼 조선 측으로서는 '파행적인 세계화' 과정의 일부였으며, 무단 영토점령 사례로서 거문도 사태를 둘러싼 지역 정세가 결국 1910년의 국권 상실로까지 이어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1885년~1887년의 사건이므로 지금부터 140년 전의 일입니다. 쇄국이라는 시대착오적 정책에다 소모적인 내부 갈등이 겹쳐 그야말로 나라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시기였습니다. 지금은 그때와 상황은 크게 다르지만 지정학적 기본 여건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게다가 나라 바깥 상황이 유동적인 데다 그때처럼 우리 내부 상황이 극한 갈등과 이전투구의 양상이라 불안하고 안타깝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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