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고도 가까운 발트해 소국(小國)들 2023.07.28
지난달 중순 우리 대통령이 리투아니아를 방문한다는 뉴스가 떴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 대체 어떤 나라인지를 알고 있었을지 궁금합니다. 사실 저도 오래전 노르웨이에 근무할 때 스칸디나비아 반도 동쪽으로, 러시아에 이르기 전 어디쯤엔가 발트해(Baltic Sea)가 있고 그 연안에 몇 개의 소국이 있다는 것 외에는 그 지역에 대한 지식은 별로 없었습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하지만 지금은 물론 그 당시에 비해서는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발트해 3국 중 그래도 리투아니아가 우리에게 보다 익숙하지 않을까 싶군요. 이문열의 2011년 소설 제목이 '리투아니아 여인'이어서 '리투아니아'라는 나라가 국내에 더 알려졌고 또 한국인 아버지와 리투아니아계 미국인 어머니를 둔 박칼린(Coleen Park)이라는 유명 예술인 때문에 리투아니아라는 나라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얼마간 관심을 더 받게 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마침 지난주에 우연히 제주 북부 조천읍(朝天邑) 와흘리(臥屹里)에 있는 모지(Moji)라는 유명 디자이너 옷가게에 들렀다가 리투아니아산 리넨(linen, 아마섬유, 麻織)을 주 옷감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리투아니아가 어느새 이만큼 가까이 다가와 있나 하면서 놀라워하기도 했습니다.
발트해에 대해 중고교 지리 시간에 배우기는 했지만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등 발트해 3국에 대해서는 당시 그 이름조차 어디에 나온 걸 본 기억이 없습니다. 러일전쟁 때 발틱함대가 발진하던 바다라는 걸 알면서도 그 연안에 다른 어떤 나라가 있는지는 몰랐던 것이죠. 발트해 3국은 유라시아 대륙에서도 가장 북쪽에 위치해 있어 거리상으로도 우리나라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고 실질적으로 상호 관계를 가질 만한 공통성이나 이해관계도 없었습니다.
이 나라들은 1990년 뜻밖에 닥친 소련의 해체로 각각 독립국가가 되면서 국제무대에 당당히 등장하였습니다. 3개국 모두 2000년대 초에 EU, NATO 등 핵심 지역기구에 가입하고 이어 OECD 회원국이 되었으니 이처럼 안정된 국제 환경에서 얼마나 빠르게 성장해왔을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1차대전 종전 후 3국이 다 독립을 선언하고 민주제도를 정착시키고자 하였으나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2차대전이 시작되면서 다시 독일, 러시아 등 주변 강대국의 지배 하에 있다가 30여 년 전 독립을 획득한 이래 줄곧 안간힘을 써온 결과로 보입니다. 모진 역사의 굴곡 속에서 민족의 정체성을 지켜내어 오늘날의 발전을 이룩한 모습이 우리나라와 비슷한 점이 있어 심정적으로 매우 가깝게 느껴집니다.
이번에 우리 대통령이 리투아니아에 가게 된 것도 이 나라가 NATO 회원국이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NATO 총회에 게스트로 초청받아 참석한 윤석열 대통령의 광폭 안보외교와 맞물려 일어난 것이죠. 리투아니아를 비롯한 발트해 3국은 물론, 폴란드 핀란드 스웨덴 등 주변국들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각기 안보에 불안을 느끼면서 자유주의 국가들과의 공동 방어전선을 마련할 즈음에 열린 큰 국제행사라서 이 나라들이 더욱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이번 나토 정상회의 소식이 뜨기 전부터 왠지 발트해 세 나라가 궁금해서 수년째 제주포럼을 통해 알고 지내오던 주한 라트비아대사를 지난달 초 한남동 대사관으로 찾아갔습니다. 그 자리에서 라트비아를 비롯한 발트해 3국의 역사와 안보·경제·문화 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대화 중, 우크나이나 전쟁이 진행되고 있는 이 시점에 주한 외교단의 일원인 러시아대사를 만나면 어떻게 대처하는가, 하고 물었더니 아리스 비간츠(Aris Vigants) 대사는 우크라니아 전쟁 전에 인사 정도는 나누었는데 지금은 서로 외면하며 지낸다고 합니다.
발트 3국의 근현대사는 꽤 알려져 있지만 그 지역의 고대 이래 역사가 궁금했습니다. 기원전으로 한참 거슬러 올라가는 민족 발흥의 초창기에 이 세 나라는 토착민족으로 또는 유입 민족으로서 발트해 연안에 각각 정주했으며 세월이 감에 따라 게르만족, 슬라브족과 섞이기도 하면서 차츰 국가 형태로 발전해 왔습니다. 그런 배경을 가진 만큼 발트해 3국은 언어도 서로 다릅니다. 세 나라 중 에스토니아어는 핀란드어와 유사성이 많고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는 옛 프러시아어의 영향을 많이 받아 언어적, 문화적으로 유사성이 많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와의 관계에서 보면 라트비아가 2015년에 가장 먼저 주한 상주대사관을 개설하였으며 리투아니아와 에스토니아는 근래에 와서 상주대사관을 개설하였습니다. 한편, 우리나라는 발트해 3개국 중 라트비아에만 상주대사관을 가지고 있으며, 리투아니아는 주폴란드대사가, 에스토니아는 주 핀란드대사가 겸임으로 각각 관할하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와 달리 이 세 나라는 우리나라에 각기 상주대사관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점으로 볼 때도 이들이 얼마나 우리나라와의 관계를 중시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라트비아는 우리나라에 자작나무를 가공한 임산품을 많이 수출하고 있으며 그외에도 라우터와 같은 ICT제품도 수출한다고 합니다. 다른 무엇보다, 지휘자 안드리스 넬슨스(Andris Nelsons, 1978~),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Gidon Cremer, 1947~),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Mischa Maisky, 1948~), 소프라노 엘리나 가란차(Elina Garanca, 1976~) 등 세계적인 음악가들이 라트비아인이라고 하니 라트비아라는 나라가 더욱 가깝게 느껴집니다. 바로 어제 동 대사로부터 들은 얘기에 의하면, 6.25전쟁 때 5, 6명의 라트비아 젊은이들이 미국 군대 소속으로 참전했다가 산화한 일도 있다고 합니다. 앞으로 발트해 3국 중 나머지 두 나라 대사들과도 만나 더 다양한 이야기를 듣게 되면 이 칼럼의 속편을 써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에스토니아와 관련해서는, 지난달 하순에 당시 주 핀란드대사로서 이 나라를 겸임국으로 관할하던 이인호(李仁浩,1936~) 대사를 우연한 계기에 만났는데 그때 들은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1990년대 말의 일로서, 레나트 메리(Lennart Meri, 1929~2006) 에스토니아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출하고 나서 차담을 하는 자리에서 이 대사가 에스토니아 역사의 어떤 대목에서 비교적 대담한 코멘트를 하자 분위기가 잠시 논쟁적 국면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이 대사가 아차하면서 스스로 역사학자 출신임을 고백하자 메리 대통령이 나도 시인 출신 대통령이니 피장파장이라고 응대함으로써 두 분이 마주보며 파안대소를 하였다고 합니다.
발트해 연안에는 이들 3개국 외에도 서쪽으로 덴마크, 독일, 폴란드, 스웨덴이 있고 북쪽으로는 핀란드 그리고 동쪽으로는 러시아가 있습니다. 러시아 북단의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바로 발트해를 끼고 있는 도시입니다. 10여년 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가서 유럽식의 고풍스런 도시 면모에 크게 매료된 바 있어 발트해 연안의 다른 도시들도 다 이처럼 아름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기후재앙으로 지중해 연안 국가들이 폭염에 휩싸여 관광지로서 매력을 잃어가고 있으므로 어쩌면 앞으로는 스칸디나비아와 북해 연안에 더해 발트해 연안이 세계인의 주요 관광지로 떠오를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런 추세를 타고 우리나라 관광객들이 발트해 3국으로 여행을 많이 하게 되면 이 나라들과 우리나라는 더욱 가까운 나라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