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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1-04-07 0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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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발언대] 대양을 잇는 운하들 *정달호 회원이 자유칼럼에 게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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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양을 잇는 운하들

2021.04.05

2만 개의 컨테이너를 실은 에버 기븐(Ever Given)호가 수에즈운하에서 좌초하여 일주일간 큰 소동을 일으키다가 지난 3월 29일 좌초에서 풀려났습니다. 22만 톤의 대형선박이 운하를 가로막아 수백 대의 선박이 발이 묶임으로써 세계무역과 글로벌 해운에 적지 않은 피해를 입혔습니다. 이집트에서 몇 년 살아보았지만 폭이 2백여 미터나 되는 운하에서 선박이 측면 진흙 벽에 부딪쳐 좌초한 전례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세계무역량의 10~12%가 수에즈운하를 이용하는데 특히 석유와 가스를 유럽으로 실어나르는 선박이 많습니다. 한중일을 비롯한 아시아 각국에서 유럽으로 수출되는 상품도 수에즈운하를 통과합니다. 이번 좌초 사태가 오래 지속되었더라면 우리나라도 큰 피해를 입을 뻔했습니다. 수에즈운하 대신 아프리카를 돌아가는 대양 항해를 할 경우 거리로는 9,650킬로미터, 시간으로는 일주일쯤 더 소요되니 수에즈운하의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세계 양대 운하 중 다른 하나인 파나마운하도 마찬가지입니다. 선박들이 운하를 이용하지 못해 아메리카 남단을 둘러서 갈 경우 엄청난 시간과 돈이 더 들어갑니다.

인류의 문명이 발달할수록 또 세계화가 진전될수록 인류는 다양한 목적으로 대양을 연결하는 운하를 필요로 했습니다. 수에즈운하의 경우 14세기부터 운하 건설을 논의하고 시도했으나 토목기술상의 애로로 성공하지 못하다가 1859년에 와서야 본격적인 건설이 시작되어 10년 후인 1869년에 개통을 보았습니다. 16세기에 운하 건설을 논의하기 시작한 파나마운하는 천리(天理)에 반한다는 이유로 교황의 반대에 부딪힌 적도 있습니다. 수에즈운하에 비해 기술적인 어려움 등 난관이 많았지만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10여 년의 공사 끝에 1914년에 개통되었습니다.  

양대 운하를 비교한다면, 수에즈운하가 사막지대를 직선으로 파낸 평평한 수로를 항해하는 데 비해 파나마운하는 험한 산악에 인공으로 만든 호수와 수로를 통과합니다. 길이는 수에즈운하가 193킬로미터, 파나마운하가 82킬로미터이며 통과 시간은 전자가 약 15시간, 후자는 1박 2일 정도입니다. 수에즈운하는 별다른 장치 없이 홍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좁은 바다를 통과하는 것이지만 파나마운하는 호숫물을 활용하는 갑문(閘門, lock) 시스템을 통해서만 운하로 출입할 수 있습니다.

파나마운하는 해수면과 호수의 높이가 다르기 때문에 양측에 특수한 갑문 장치가 없으면 선박이 오르내릴 수가 없습니다. 즉, 대서양쪽과 태평양쪽 두 출입구에 각각 3단계의 갑문을 만들어 운하에 들어올 때는 1단계 갑문에 호숫물을 채워 부상시킨 후 2단계로 올라가게 하고 같은 방법으로 3단계까지 올라가서 그다음부터는 거대한 인공의 호수를 항해하다가 반대편 바다로 나갈 때는 그 반대의 과정을 거쳐 내려갑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많은 물이 필수적인데 워낙 비가 많이 오는 나라라서 물 걱정은 그리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선박 한 대가 통과하는 데 소요되는 물은 인구 5만 도시의 하루 용수의 양과 같다고 하니 호수에 얼마나 많은 물이 가둬져 있는지 짐작할 만합니다. 각 갑문마다 양쪽에서 전동차가 선박을 끌어서 이동시키는 매우 복잡하고 정교한 장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파나마에 근무하면서 운하에도 여러 번 가보았고 선박에 승선해보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운하 시스템으로 볼 때 파나마운하는 선박이 좌초하기 어려운 구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두 운하는 이러한 구조적 차이도 있지만 각기 독특한 역사적 에피소드를 가지고 있습니다. 수에즈운하는 프랑스 외교관 출신인 페르디난드 드 레셉스(Ferdinand de Lesseps, 1805~1894)가 맡아 성공적으로 완료시켰습니다. 파나마운하도 수에즈운하 성공으로 득의만만하던 레셉스가 야심차게 시작은 하였으나 난공사와 열대병 등 악조건을 버티지 못하여 4년 만에 중단하고 결국 미국측에 넘기고 맙니다. 미국으로서는 상업적 목적 못지않게 두 대양을 잇는 전략적 통로가 절실했던 것이지요.

수에즈운하 개통과 관련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역사적인 운하 개통을 앞두고 당시 이집트 왕은 면(綿) 수출에서 번 돈이 많아 부자라고 좀 으스대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개통식에 프랑스 나폴레옹 3세의 왕비, 러시아의 왕녀 등 유럽 각국의 귀족 명망가들을 초청하여 최고의 대우를 해줍니다. 두 왕가 여인에 대해서는 각각 궁전 하나씩을 지어 줄 정도였습니다. 그 외에도 개통식 행사를 최대한 화려하게 하느라고 빚을 내기까지 하였습니다.

면 수출로 돈을 번 것은 남북전쟁으로 인해 미국의 대유럽 면 수출이 막혀 이집트 면 값이 천정부지로 올랐던 때문인데 전쟁이 끝나고 면 가격이 안정되자 이집트 왕은 빚더미에 앉게 되었죠. 이집트 왕이 소유하던 운하 주식은 빚을 값느라 거의 다 영국측에 넘어갔으며 그 후로는 영국이 독자적인 운하 운영권을 행사하게 됩니다. 프랑스도 일부 주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영국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었습니다.

수에즈운하 개통식에는 당초 피라미드 앞에서 웅장한 오페라를 시연하기로 돼 있었는데 사정상 그때까지 오페라가 완성되지 않아 개통식에서는 시연을 하지 못하고 그 이듬해에 하였습니다. 그 오페라가 바로 베르디의 '아이다(Aida)'입니다. 지금도 그 전통이 남아 있어 일 년에 한 번 또는 특별한 계기가 있을 때 피라미드 앞에서 '아이다'를 연주합니다.

파나마운하 건설과 관련해서도 이 못지않게 드라마틱한 사연들이 있습니다. 프랑스 회사가 운하 사업권을 미국에 팔아넘기려고 애를 쓰는 동안 미국측은 두 가지 옵션을 검토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프랑스측으로부터 파나마운하 건설을 승계하는 방안이고 다른 하나는 니카라과를 관통하는 운하를 새로 건설하는 것이었습니다. 미 의회는 열띤 토론 끝에 공사하기가 쉽고 안전한 니카라과 옵션으로 기울고 있었습니다. 이때 유능한 프랑스 회사 책임자가 백방으로 설득하러 다니다가 화산이 그려져 있는 오래된 니카라과 우표들을 구하게 됩니다. 그는 이 우표들을 증거로 니카라과는 화산 폭발의 가능성이 있다고 미국측을 설득하여 결국 파나마 옵션으로 결정이 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미국은 운하 공사를 프랑스측으로부터 승계받았지만 당시 파나마지협을 지배하던 콜롬비아가 입장을 번복하여 미국에 운하 굴착권을 내주기를 거부합니다. 이에 미국은 대 콜롬비아 해상 무력 시위를 하면서 파나마 지역 주민들을 움직여 그 지역을 콜롬비아로부터 분리시켜 독립된 나라로 만듭니다. 그렇게 해서 파나마라는 나라가 새로 탄생하게 되죠. 파란만장한 과정을 겪은 파나마운하 건설로 인해 파나마라는 독립 국가가 생긴 것입니다. 이런 연고도 있어 독립 직전부터 지금까지 파나마는 미국 달러화를 자국 화폐로 수용하여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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