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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천
  • 20-03-27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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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발언대] 봄에는 *정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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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는
newsdaybox_top.gif정달호 2020년 03월 25일 (수) 00:21:31newsdaybox_dn.gif

봄의 외국어를 보면 영어는 스프링(Spring), 프랑스어는 프랭땅(Printemp), 스페인어와 이태리어는 프리마베라(Primavera), 독일어로는 프륄링(Fruehling)입니다. 영어 '스프링'의 어원은 알 길이 없지만 나머지는 말 속에 다 '으뜸', '먼저' 또는 '일찍'이라는 뜻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봄은 '으뜸 계절' 또는 '먼저 오는 계절'인 셈이죠. 우리말 '봄'에는 어떤 내력이 있는지 알아내기 쉽지 않을 듯합니다. 혼자서 상상만 해볼 뿐이지요. 봄에는 새싹이나 새 생명들을 보고, 여름에는 열매가 열리고, 가을에는 거둔 후 다시 땅을 갈고, 겨울은 지루할 만큼 길다. 이런 식으로 억지로 꿰맞춰봅니다. 메마른 들판이나 눈 덮인 계곡이 연상되는 긴 겨울이 끝날 때면 눈에 보이는 게 많습니다. 그렇습니다. 봄에는 볼 것이 많습니다.

얼마 전 오랜 친구가 느닷없이 시(詩) 한 편을 보내왔습니다. 봄이란 말이 들어간 유명한 시, 이상화(李相和, 1901~1943)의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였습니다. 고교 때 눈시울을 적셔가며 읽고 또 읽던 시죠.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중략)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너는 삼단 같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중략)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발목이 시리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후략)" 지금 읽어도 젊은 시절에 느꼈던 그 감흥과 감동이 다시 입니다.  흔한 흙, 그 땅조차 내 것이라 할 수 없었던 때를 생각하면서 복받치는 설움에 울컥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이상화의 시 말고도 봄에 관해서는 많은 시가 있고 노래도 있습니다. 노래로는 "봄처녀 제 오시네"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더 많이 불리는 것은 '고향의 봄'이겠고 그다음으로 "봄이 오면"일 것입니다. 이런 걸 통계로 잡아 순번을 매길 수는 없을 것입니다. '봄처녀'는 봄을 처녀에 은유한 것이라 뇌리에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새 풀 옷 입고 진주 이슬을 신고 오는 처녀 . . .  이 얼마나 멋진 비유입니까. 봄이 오면 산에서 들에서 나물 캐는 처녀가 눈에 띱니다. 울긋불긋 꽃 대궐을 차린 동네 마을에서도 처녀들이 신나게 뛰어다닐 듯하지 않습니까. 봄과 처녀, 어딘가 닮은 데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시골에 살면 사실 봄을 상찬(賞讚)하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농부는 부드러운 흙에 씨를 뿌리겠지만 저와 아내는 씨는 안 뿌려도 부드러운 흙을 그냥 보고만 있지 못해 안달입니다. 보면 볼수록 이 흙에서 없애야 할 것, 저 땅에는 있어야 할 것들이 떠오릅니다. 한편으로 수선화야, 매화야, 목련아, 산수유야 하고 반가워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겨울 동안 마르고 사그라져 죽은 것들을 잘라내고, 제멋대로 얽히고설킨 넝쿨들을 걷어내야 합니다. 일이라는 건 때가 있어서 하고 싶을 때나 하고 하기 싫을 때는 마냥 빈둥거려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기 싫을 때 억지로 마음을 내 호밋자루라도 잡아야 합니다. 일을 하다 보면 주변 풍광에 눈길을 돌릴 수 있고 또 일을 끝내고 일어날 때의 뿌듯함을 미리 맛보는 즐거움도 있습니다.

가장 쉬운 일은 가지치기일 것입니다. 이젠 웬만한 정원사처럼 무얼 베어내고 무얼 잘라야 할지를 대충 알 정도가 되었으니까요. 그다음 우리가 좋아하는 일은 작은 나무나 꽃들을 옮겨 심는 일이죠. 작년에 수선화 구근을 쪼개 뜰안 여기저기에 나눠 심은 것이 올해를 수선화 천국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무언가를 심을 때 저는 삽으로 흙을 파고 아내는 꽃나무를 심고, 둘이서 흙을 북돋우고 물을 주고 하면서 마무리를 합니다. 올해는 작년 봄 블루베리밭 앞 길쭉한 꽃밭에 심었던 국화 여남은 덩어리를 잡초를 빼고 난 다른 구석자리에 옮겨 심었답니다. 아직도 반쯤이 남은 국화를 비 갠 뒤 다 파내서 밭 뒤 언덕배기에 퍼뜨려 심을 일이 남았습니다. 이 일이 다 끝나고 여름 지나 어느덧 가을이 되면 뜰의 모습이 더욱 멋지게 변해 있을 겁니다.

올해는 이런 작은 일들을 시작하기 전에 사람과 장비를 동원해서 하는 큰 일도 있었답니다. 오래전에 심은 작은 나무들이 칠팔 년 새 크게 자라서 동산이 너무 촘촘해진 모양새라 볼 때마다 불편함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이번에 군데군데 시원하게 뽑아내서 아래 마당 구석구석에 옮겨 심었습니다. 그렇게 크고 작은 나무 열댓 그루를 옮겨 심었더니 뜰의 모습에 훨씬 균형이 잡힌 것 같습니다. 이런 큰 일들이 마무리된 후에 보니 여기저기 빈 데가 새롭게 눈에 띄어 국화를 옮겨심을 생각이 났던 것이죠. 그 밖에도 빈 자리가 꽤 있어서 무슨 꽃으로 채울까를 궁리 중에 있습니다. 뜰을 한 바퀴 돌아보노라면 크고 작은 나무들이 봄 물을 끌어올려 가지 끝 부분이 불그스름합니다. 어린 아기를 보는 듯한 이 기분은 또한 봄에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좋은 정원을 만들기 위해서는 서적을 참고할 수도 있지만 가장 손쉬운 방법은 잘 만든  정원들을 찾아보고 거기서 아이디어를 얻는 것입니다. 아내는 특별한 정원이 딸린 "베케"라는 카페엘 이따금 가서 영감을 받아온다고 합니다. 그 카페는 서귀포 중심에서 보다 남쪽인 위미리(爲美里)에 자리하고 있는데 베케는 제주말로 돌을 던져서 아무렇게나 쌓인 낮은 담이나 돌무더기를 의미합니다. 그 정원은 조경에 조예가 깊은 주인이 직접 설계, 조성한 것으로 정원의 볼거리 때문에 카페가 늘 북적인다고 합니다. 우리도 정원의 일부인 포트묘(Pot 苗) 판매소에서 작은 식물들을 사 와 뜰에 심곤 합니다. 봄의 부드러운 흙 얘기를 하다 보니 영어의 스프링(Spring)이란 말이 봄에 싹이 흙을 뜷고 튀어나온다는 것에서 연유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아무튼 봄에는 흙을 가까이 하며 지내는 것이 시골의 삶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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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수의 송천
한성대 명예교수, 전 한국행정학회장, 현 팍스코리아나연구소 이사장